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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스타일리스트

; 현대 패션의 초석을 다진 여인

by MODA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 중 하나로 꼽히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초상화에 등장한 여인


의복을 착용자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해주는 수단으로 만들어 현대 패션으로 가는 초석을 다진 피렌체 공작부인 레오노르{Leonor de Toledo}는 이탈리아 패션 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르네상스의 스타일리스트였습니다.



피렌체 공작부인 레오노르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녀는 나폴리 총독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11살에 나폴리로 이주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와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매우 역동적이고 개방된 환경의 나폴리 궁정에서 레오노르는 호화로운 축제와 화려한 드레스를 접하며 사치를 배웠고, 스페인 귀족의 엄격한 에티켓에 따라 교육받으며 사회적 지도자층의 필수적인 자질과 덕목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렇게 1539년, 피렌체 공작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와 결혼하여 공작부인이 되죠.


외국인 신부들은 혹독한 평가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거만하고 불친절한 태도에 스페인식 매너와 관습을 버리지 않아 '야만적인 스페인 여성' 혹은, 공작부인으로서 행했던 업적을 기려 '완벽하게 입양된 피렌체 여성'이라는 상이한 평가를 받았던 그녀의 시작은 사랑받는 아내였습니다.






권력과 함께 온 첫눈에 반한 사랑

피렌체의 젊은 공작 코시모 1세는 운이 좋았습니다. 결혼으로 권력과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죠.


여느 왕가가 그렇듯, 이제 막 공작이 된 18세의 코시모 1세는 좋은 결혼으로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조건에 걸맞은 신붓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더 신중을 기해 찾아야 했죠. 선대 공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방계였던 어린 청년 코시모 1세가 하루아침에 공작이 되자, 그에게 '꼭두각시' 역할만 바라는 욕심 많은 원로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집안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코시모 1세에게 한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나폴리의 총독인 돈 페드로{Don Pedro de Toledo}는 이탈리아 반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권위자였습니다. 그에게는 결혼 적령기인 딸들이 있었죠. 모두 총독의 장녀와 코시모 1세가 맺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에겐 마음속에 품은 다른 여인이 있었으니...


결혼 직전의 19세의 코시모 1세와 17세의 레오노르


바로 총독의 차녀 레오노르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3년 전, 코시모 1세가 외교 사절단으로 잠시 나폴리에 다녀갔을 때 알게 된 사이였죠. 우아하고 아름다운 레오노르에게 흠뻑 매료되었던 코시모 1세는 그녀를 아내로 삼기로 결심했고, 그녀의 아버지가 결혼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세심하게 외교를 펼쳤습니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코시모 1세에게 '나폴리의 웃음거리인 뇌'라고 소문난 큰 딸과 결혼하라 권했기 때문이죠.


하여 이 결혼을 위해 코시모 1세의 어머니도 나섰습니다. 위대한 피렌체의 지도자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의 외손녀였던 코시모 1세의 어머니는 방계인 아들 코시모 1세를 공작의 자리에 올려놓은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며느리가 될 레오노르를 사로잡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죠.

베네치아로 사람을 보내 최상품의 진주 200개를 구입해 그중 마르가리타 섬에서 채취한 최고급 진주 50개를 먼저 선물로 보낸 후, 나머지는 결혼한 뒤에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세심한 노력 끝에 비슷한 또래의 선남선녀는 1539년, 20세와 17세의 아름다운 나이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메디치{Medici}가문과 톨레도{Toledo} 가문의 결합은 피렌체의 젊은 공작에게 매우 전략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레오노르의 가문은 당시 메디치가문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에 있었죠. 레오노르의 아버지 돈 페드로는 스페인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결혼을 통해 코시모 1세는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페인의 높은 귀족 가문과 가족이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매우 좋았습니다. 겉으로는 정치적 결합이었지만 안으로는 큰 애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죠. 레오노르는 당시 가장 매력적인 신붓감이었고, 메디치 가로 들어온 가장 아름다운 신부였습니다. 그녀는 공작의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코시모 1세를 너무도 사랑했던 레오노르는 잠시라도 그와 떨어져 있을 땐, 하루에 적어도 두통의 편지를 요구할 정도였고, 코시모 1세 또한 정부가 흔했던 시기 레오노르에게만 충실했습니다. 둘 사이 11명의 자녀를 낳음으로 레오노르는 대가 끊길 뻔했던 메디치 가문의 미래를 공고히 다지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나갔지요.



겸손과 기쁨의 다산
{Cum pudore laeta foecunditas}



1545년경의 레오노르 / 1560년경의 레오노르


자신의 모토를 '겸손과 기쁨의 다산'으로 정했을 만큼 다산은 레오노르가 내세우는 가족 윤리였습니다. 18세부터 32세까지 쉴 새 없는 무리한 임신과 출산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본인의 건강과 외모에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건강상태를 숨기기 위해 그녀는 크고 화려한 드레스로 자신을 꾸몄습니다.



그녀의 옷장 - 르네상스의 스타일리스트

레오노르는 의복이 지닌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화려함으로 유명했던 나폴리 궁정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그녀는 사치품을 사랑했으며, 옷을 통해 지위를 표현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신부로 피렌체에 첫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녀는 강렬한 차림새로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죠.



.. 검은색 새틴 드레스는 머리와 옷깃에 멋진 금빛 점들로 가득 차...



처음 남편의 나라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원래 입었던 스페인 스타일의 복장을 고집했습니다. 외국인 신부들이 결혼 후에도 출신 나라의 의복을 고수하는 이유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주장과 출신국에 대한 충성의 메시지가 투영된 일종의 정치적인 행태였죠.

레오노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의도적으로 스페인 스타일을 고수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강국에서 온 공작부인의 스타일은 널리 모방되었습니다. 이렇게 피렌체의 궁정 복장은 스페인풍의 영향력에 놓이게 됩니다.


그녀의 큰 옷장은 방대한 양의 정교하고 세련된 직물과 화려한 드레스, 빛나는 보석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녀는 다양한 아이템을 한꺼번에 착용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렇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갔습니다. 현대로 말하자면 믹스&매치 스타일을 즐겼죠.


당시 문화를 이끌며 세련된 미를 추구하던 피렌체 사람들은 그녀의 과한 패션에 동요했습니다. 두 개의 귀걸이를 함께 착용한다던가, 남성용 운동복, 웨지가 달린 높은 신발 등 모두 높은 계급의 여성들은 하지 않았던 아이템들도 착용하고 나타났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피렌체 사람들은 하나의 스캔들로 여기며 수군거렸습니다.


브라게제를 입은 베네치아 코르티지아네, 16세기 / 16세기 브라게제


그녀는 말을 타기 위해 주홍색 타페타{taffetà(가벼운 실크 원단)}로 만든 바지도 입었습니다. 당시엔 바지를 입는 여성들은 창녀들로, 베네치아의 고급 창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기 때문에 궁정에서 바지를 입는 여인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승마와 사냥을 즐겼던 레오노르는 남자들이 입는 스포츠 웨어를 과감히 착용했죠. 후대에 행해진 조사로 그녀는 1.58cm의 키에 좋은 근육을 가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16세기 금속 부스토와 천으로 만든 보디스


그녀는 벨벳 부스토{Busto}도 착용했는데, 타페타를 씌워 만든 금속 부스토도 두 개나 있었습니다. 공식석상에 빠지지 않는 점을 자랑으로 삼을 만큼 공무수행에 열심이던 그녀가, 폐출혈로 똑바로 서있지 못했을 때 금속 부스토가 몸을 지탱해 줘 애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화려하고 과감한 스타일에 사람들은 수군댔지만, 동시에 '스페인풍' 화려하고 빛나는 지도자의 취향을 따라 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였습니다. 레오노르의 이런 점은 패션 역사에서 새로운 포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의복은 더 이상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대로 입는 게 아닌, 착용자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해주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드레스는 이제 현대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도자의 이러한 취향은 지역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피렌체의 섬유 산업이 발달했고, 재단사는 옷이 아닌 예술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장인들은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해 매우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천과 호화로운 드레스를 만드는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기본적으로 '장인정신이 깃든 창의적인 생산물'이라는 의미의 'Made in Italy'라는 수식어가 탄생하는 기초가 탄탄히 다져지고 있었죠.



1599년의 피티 저택과 보볼리 정원
피티 저택과 보볼리 정원


1549년, 레오노르는 가족을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에 돌입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이들이 도시 중심지보다는 야외의 자연에서 뛰어놀 수 있게 Pitti가문의 소유였던 피티 저 저택{Palazzo Pitti}를 구입하죠. 저택의 뒤 쪽엔, 우거진 지역을 가리키는 고대 명칭인 'de' Boboli'라 불리는 넓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공작 가족은 취향에 맞게 구조를 확장하며 새로운 저택에 어울리는 멋진 정원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여러 건축가들이 수년에 걸쳐 완성한 정원은 오늘날 이탈리아의 3대 정원으로 꼽히는 피렌체의 보볼리 정원{Giardino di Boboli}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고 활보했던 피렌체의 피티 저택은 20세기에 들어서는 이탈리아 패션쇼가 열리는 국제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세계 최대 패션 박물관 중의 하나인 '패션 박물관{Museum of Costume and Fashion}'이 설립되었습니다. 레오노르의 패션에 대한 열정은 아주 큰 꽃으로 피워 이탈리아가 패션의 본고장이 되는데 일조하게 되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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