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상화의 목적
Cosimo I de' Medici는 힘이 없었습니다.
Medici가(家)의 하위 가문에 속했던 그는 겨우 17세에 선대 공작의 갑작스러운 암살로 권력의 자리에 올랐고, 주변에는 어린 Cosimo를 좌지우지하려는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 원로들로 가득 차 있었죠.
하지만, 그는 똑똑한 야심가였습니다. 숨겨왔던 야심을 드러낸 첫 번째 순간이 바로 스페인과 연결된 Leonor와의 결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스페인 귀족 혈통과의 결합이라는 주제를 통치 초기부터 선전 도구로 활용했죠. 그는 당시 암살이나 망명 같은 일로 위신이 떨어져 있던 Medici가문의 힘을 회복하고, 선대 공작의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하여 23살의 아내와 세 살이 된 둘째 아들 Giovanni를 호화로운 드레스와 가문의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며 화폭 앞에 세웠습니다. Medici가문의 정치적 재탄생과 미래 세대로 이어지는 영속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왕가 초상화가 그려질 때는 예외 없이 선전의 요소가 첨가되기 마련입니다.
Leonor의 경우 완전한 선전용 초상화로 매우 이상화된 왕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궁정화가 Agnolo Bronzino는 Leonor를 아들과 함께인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섭정의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림 속에는 그녀의 계급 · 권력 · 재력 · 모성애를 보여주기 위한 요소들이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드레스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죠.
사실 이 외국인 공작부인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Leonor에 대한 여론의 평은;
남편의 나라에 적대적인 스페인 야만인..
이미지 개선을 위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초상화 속에서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채, 창백하고 매끄러운 피부, 다소 차가운 시선과 초연한 무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두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의 표정 또한 늠름한 기색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냉담함과 초연함은 전형적인 궁정 초상화의 특징입니다. 지도자의 진지한 표정은 침착함을, 바른 자세는 안정감과 확실성을 나타내 주는 장치죠. 거기에 Leonor는 아들을 부드럽게 감싸며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포옹으로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까지 첨가했습니다.
검푸른 배경은 그녀의 머리 주변에서 밝아지면서 마치 '후광'처럼 보이는데, 이는 당시 여성의 권위에 큰 영향을 미친 다산을 과시하고, 모범이 되는 그녀의 근본적인 역할을 찬양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배경의 검푸른 색은 매우 귀하고 비싼 청금석에서 나오는 색이었기 때문에 이 색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Leonor는 야외 테라스의 붉은색 의자에 앉아있으며, 이 검푸른 배경은 하늘입니다. Leonor의 뒤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피렌체의 강과 토지는 그녀의 섭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화가의 상상력은 현실이 된다. 그림 속에서..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 중 하나로 꼽히는 Leonor의 초상화 속 드레스
화가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드레스의 디테일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며 묘사했습니다. 이 화려하고 정교한 드레스와 보석은 주변의 오래된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가문의 건재함을 주장하고 과시해야 했던 Medici가의 메시지였습니다. 도시를 다스리는 가문끼리 서로 견제하고, 권력 다툼은 쉽게 죽음으로 이어지던 시대였죠.
초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의 드레스는 국가의 위상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호화로움은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초상화 속 의상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먼저, Leonor의 드레스로 피렌체 궁정에 스페인 문화가 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드레스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스타일의 완벽한 혼합으로 몸통은 스페인, 스커트는 이탈리아 스타일에, 소매는 스페인 스타일이 건너와 더 발전했습니다. 많은 도시 국가로 나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외국의 패션이 들어와 현지 패션과 섞여 새로운 스타일로 탄생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패션이 발달된 주된 원인이었죠.
당시 스페인 드레스의 특징은, Leonor가 착용한 드레스처럼 몸의 라인을 모두 비슷하게 보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여성의 몸을 코르셋에 가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Leonor의 드레스 상체(Bodice*)는 자연스러운 가슴과 허리의 곡선은 보이지 않게 눌러 원통형 깔때기 모양으로 변형시킨 스페인 스타일입니다.
*Bodice(Corpiño) - 16~18세기 유럽에서, 몸통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갈대나 가죽, 고래수염 등으로 구조를 만들고 직물로 덧댄 상의, 코르셋의 초기 형태
스타일이 나뉘게 된 스커트 부분은 - 스페인은 앞으로 유럽 드레스의 지배적인 실루엣을 만들어 줄, 스커트 지지대인 Verdugado(파팅게일의 원조)를 착용 시 형성되는 종 모양 스커트였고;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식 스커트는 속치마를 입고, 겉치마 허리라인에 많은 주름을 잡아넣어 풍성하게 만든 실루엣이 유행했습니다.
이 화려한 드레스는 피렌체의 발달된 직물 산업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드레스는 Telétta라고 하는 매우 귀한 은색 천으로 만들어 피렌체 직물의 정점을 드러내 주죠. Telétta는 금사나 은사가 들어있는 직물로, 당시 피렌체 공방 생산품의 자랑이었습니다.
Leonor는 궁정 복장을 만들기 위해 10명의 금·은 직공을 고용했고, 숙련된 장인들은 궁전에 거주하며 공작부인을 위해 독점적으로 일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접해보지도 못했을 귀족 의상의 상징 그 자체인 Telétta로 만든 드레스를 Leonor는 6벌이나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사치 방지법이 발휘되던 시대에 법 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표식과도 같았습니다.
은실로 직조된 드레스는 브로케이드* 기법으로 아라베스크 문양과 금실로 표현된 석류 모티브로 가득 차 있고, 몸통 한 중간에는 의도적으로 크게 석류 문양을 배치했습니다.
보통 결혼과 다산의 상징인 석류는 스페인 문화권에서 Karl V세의 아내인 Isabella황후의 상징으로, Leonor를 왕비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브로케이드(brocade) – 견직물에 금사나 은사가 떠오른 것처럼 보이게 무늬를 낸 두꺼운 장식용 직물
시대적 미적 포인트는 넓은 어깨!
16세기 인기를 끌었던 패션인 부착형 슬릿 소매는 여전히 유행 중이었습니다. 어깨선이 더 내려갔고, 소매와 몸통을 끈으로 엮어주면서 생기는 틈새로 속에 입은 셔츠를 꺼내 퍼프소매처럼 큰 볼륨감을 주어 전체적으로 넓은 어깨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넓은 어깨가 시대적 미적 포인트였죠. 한동안 여인들의 어깨는 끝간데를 모르고 넓어져만 갔습니다.
스퀘어 네크라인으로 넓게 파인 부분은 금실에 진주를 달아 만든 그물망으로 덮었는데, 이는 점점 더 넓고 깊어지는 목선을 법령으로 금지시키자 여인들이 새로 만들어 유행시킨 Coverciere(Partlet) 패션입니다.
이 호화로운 장식 망으로 머리도 꾸몄는데, 이는 Reticella라고 불리는; 그물망 속으로 모든 머리카락을 정리해 넣은 스페인 스타일이죠. 우리네 여인들이 결혼을 하면 쪽을 지어 올렸듯, 유럽 또한 보통 결혼한 여인들은 유혹의 상징이었던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거나 천으로 감싸 보이지 않게 꾸몄습니다.
이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드레스는 사실 오래도록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이 드레스는 Leonor의 사망 시 함께 무덤에 묻혔을 테지만 조사 때 드레스는 발견되지 않았고, 궁정 재산 목록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매우 유사한 천조각은 존재해 피렌체 박물관에 있죠.
하여 드레스는 화가 Bronzino의 상상력이 곁들여진 산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표현해낸 직물의 질감과 디테일로, 의뢰자나 화가의 의도답게 왕실 선전용으로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 탄생되었습니다. 그 결과 Leonor의 드레스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죠.
왕조적 허세의 표식; 보석
Leonor의 드레스도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집안 보석을 모두 걸치고 나온 듯 그녀는 온몸에 보석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화려한 보석들은 단순히 자랑하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Medici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보석들은 스페인 귀족 출신 Leonor를 Medici가의 아내로 표시하고, 동시에 Cosimo 자신을 스페인 혈통과 연결된 고귀한 혈통의 새로운 통치자로서, 자신을 통한 Medici가의 재탄생을 주장하려는 고도로 계산된 왕실의 선전이었습니다.
Leonor는 보석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특히 진주를 가장 좋아했죠. 궁정 보석 목록에는 244~247개의 다양한 형태의 진주들이 묘사되어있을 정도로 Leonor는 많은 진주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진주와 관련된 Cosimo의 아내 사랑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진주 한가닥을 발견한 Leonor가 사고 싶어 하자 진주의 결함을 발견하고 반대하던 측근에게 Cosimo는 진주를 구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Leonor 본인도 충분히 진주를 살 여유가 있었지만,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원하는 보석을 Cosimo가 사주길 바랬습니다.
당시엔 '진주는, 진주를 착용한 사람들을 겸손하고 정숙하게 살도록 유도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신부에게 적합하다고 여겨 신부들은 진주로 치장했고, 결혼 선물로 진주 목걸이를 받기도 했죠. Leonor의 목을 장식하고 긴 진주 목걸이 또한 Cosimo의 결혼 선물이었습니다. 이후 이 목걸이는 토스카나 공작부인을 상징하며 대대로 물려졌습니다.
귀걸이는 여성 초상화 속에서 시기를 알려주는 단서가 됩니다. 16세기부터 귀족 여성들은 귀걸이를 하기 시작했죠. 그녀의 귀에서 달랑거리는 스타일의 진주 귀걸이 또한 스페인 풍입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펜던트가 매달려있는 귀걸이는 부도덕함을 의미했고 주로 창녀들이 착용하는 장식품이었습니다. Leonor는 물방울형 진주 귀걸이를 애용했으며, 심지어 이중으로 귀걸이를 하는 등 본인만의 패션 스타일을 만들어갔죠.
목에 더 가까이 있는 짧은 진주 목걸이에는 35캐럿 이상의 피라미드형 다이아몬드 펜던트와 물방울 진주가 달려있습니다. 피라미드형 다이아몬드는 15세기부터 Medici가 가문의 상징으로 채택한 보석으로, 모토는 'Semper'였습니다.
'항상' 또는 '영원히'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르네상스 시대에도 다이아몬드는 [다른 도구로 자를 수 없으며, 두 개의 다이아몬드로 서로를 문질러야 깎을 수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러한 다이아몬드 펜던트는 불안정한 시기 Medici가의 단단한 내구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계산된 선택이었습니다.
동시에..
르네상스 시대 다이아몬드는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었는데, 다이아몬드를 깎는 과정에서 나오는 가루는 치명적이어서 흔히 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적을 죽이기 위해 음식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섞기도 했던 시기, Leonor의 다이아몬드 펜던트는 감히 누구도 Medici가를 위협할 수 없음을 암시해줍니다.
스페인 패션의 영향으로 상체에 보디스*(Bodice)를 착용하게 되면서 얇게 만든 허리를 강조해주는 장식 벨트는 필수 액세서리가 되었습니다.
*(Bodice) - 16~18세기 유럽에서, 몸통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갈대나 가죽, 고래수염 등으로 구조를 만들고 직물로 덧댄 상의
Leonor의 허리 중심에서 빛나고 있는 벨트의 보석은 루비로, 당시엔 루비를 가장 비싼 보석으로 평가했습니다. Leonor의 이 허리 벨트에만 4개의 루비와 3개의 다이아몬드를 달았는데, 다이아몬드와 루비의 조합은 Medici가를 식별할 수 있는 표식입니다. 이러한 관습을 시작한 이는 바로 Leonor! 그녀 이후 Medici가 신부들에게 다이아몬드와 루비를 주는 것이 전통이 되죠.
길이가 무릎까지 이어지는 이 긴 벨트에 여인들은 당시 유행이었던 향수 통이나 부채를 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여인들은 지적인 교육을 받았어도 춤과 연회 · 가십거리로 채워진 사교계 무대가 전부였던 당시, Leonor는 남편과 함께 나라를 관리하고 남편이 병중이거나 부재중일 때는 능숙하게 섭정으로 군사 업무 지휘까지도 수행해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부분은 재정관리로,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문제를 본인의 지참금을 써가며 해결했고, 남편의 부동산 관리 및 투자로 자산을 늘려 결혼 전 매우 소박했던 Medici가의 경제 상황은 크게 개선되었죠.
가난한 소녀들에게 지참금을 지원해주었고, 개인 자금으로 수도원이나 구호단체에 후원하는 등 직접 필요한 곳을 찾아 많은 자선 또한 베풀었습니다.
문화사업에 있어서도 그녀는 정부차원에서 끊임없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개인적 신념으로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결혼 시 그녀의 지참금 박스엔 이집트와 에트루리아에서 수집한 골동품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수집품들과 금전적 지원에 힘입어 Medici 가는 후에 Uffizi를 설립하고 피렌체의 문화와 예술은 발전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평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녀의 몸에 밴 오만함과 거만함 그리고 스페인 출신임을 비난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피렌체의 공작부인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고, 가족을 제외하고 그녀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호의를 베푼 곳은 대부분 스페인과 관련된 곳들이었습니다. 궁정에서 본인의 하인들은 거의 모두 스페인 사람들이었으며, 죽어갈 때도 계속 그들을 보호하라는 명을 유언장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스페인보다 이탈리아에서 산 기간이 훨씬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어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피렌체 시민들은 Leonor의 아름다움과 Medici왕조의 미래를 공고히 다져준 그녀의 다산을 존경했지만, 동시에 정착한 곳의 언어도 배우지 않는 그녀의 우월감 가득한 스페인식 매너에 불쾌감을 느꼈죠.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아버지를 따라 나폴리로 간 어린 시절, 자신들을 다스리러 온 스페인 사람들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나폴리 궁정의 환경에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법을 일찍부터 배워야 했던 그녀의 자기 방어적 생존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시민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그녀에게는 그녀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습니다.
어려웠던 Medici가를 다시 일으키고 피렌체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며, 특히 이탈리아 패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타고난 지도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