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모네타 베스푸치
태어난 순간부터 신화가 되고 이른 죽음으로 전설이 된 여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
피렌체 황금시대의 여신으로 등극하면서 시인과 화가들의 뮤즈가 되었고,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수많은 이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살아있는 비너스가 되어 한 시대의 상징으로 살아가다 너무 이른 죽음으로 -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으로 남은 그녀는 르네상스의 '슈퍼 모델'이자 '미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그녀는 탄생부터 신비로웠습니다.
그녀는 비너스처럼 파도 사이에서 태어났다..
라는 당대 시인 폴리지아노{Poliziano(Agnolo Ambrogini)}의 시적 표현으로, 그녀에겐 마치 탄생설화처럼 출생부터 신화적인 아우라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에 대한 출생일이나 출생지, 세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1453년경 현재 이탈리아 서북부 해안도시인 제노바{Genova} 공화국에서 태어난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죠. 결혼 날짜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심지어 그녀가 누군가와 주고받은 편지는 한 통도 남아있지 않아 그녀가 읽고 쓸 수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합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남편을 따라 피렌체로 옮겨간 후,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나 소네트{Sonett(14행시)}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피렌체의 시인 폴리지아노는 시모네타를 실제 만났던 사람으로, 그녀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 노력은 탄생부터 신비롭게 꾸며주는 일로 시작되었죠.
시모네타의 어머니는 전 제노바 공화국 총독의 부인으로, 남편이 죽고 난 후 공화국의 원로인 고귀한 카타네오{Cattaneo} 가문의 가스파레{Gaspare}와 결혼해 시모네타를 낳았습니다. 최고위층으로 안락한 삶을 살았던 가족은 시모네타의 오빠(이부)이자 제노바 총독인 피에트로{Pietro}에게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자, 피렌체 근처의 작은 해안국인 피옴비노{Piombino} 후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피렌체에서 온 한 남자를 만나죠.
피렌체 청년 마르코 베스푸치{Marco Vespucci}는 눈부시게 맑은 피부와 빛나는 긴 금발머리, 여리여리하며 슬픈 눈망울을 가진 또래의 소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르코는 은행가로, 오랜 망명생활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회복하려는 시모네타의 가족에게 그는 희망처럼 느껴졌고, 무엇보다 그는 메디치{Medici}형제와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마르코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16살 또래의 연인은 1469년경 결혼하여 함께 피렌체로 가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그녀의 새로운 인생 서막이 피렌체에서 시작됩니다.
메디치 형제들로 인한 주입식 미의 여왕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형제'의 시대였습니다.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이끈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Lorenzo de' Medici)}가 막 권력을 잡아 수장이 되어 피렌체를 이끌고 있었고, 그 옆에는 '젊음의 왕자'라 불리던; 교양 있고 잘생긴 몽상가 줄리아노{Giuliano de' Medici}가 형이 가꾸어 놓은 르네상스 문화를 만끽하며 즐기고 있었죠.
메디치 형제와 친분이 있던 새신랑 마르코는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메디치 궁정으로 부인 시모네타를 데려가 소개했습니다. 메디치 형제는 크게 환대하며 신혼부부를 위해 화려한 파티도 열어주죠.
그녀는 사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예쁜 미인이라기보다는 분위기 미인에 가까웠습니다. 그녀를 매력적으로 이끈 건 우아한 태도와 특유의 분위기였죠. 사람들은 특히 그녀의 성격에 매료되었는데, 상냥하고 친절한 그녀에대해 시인 폴리지아노는 이렇게 남겼습니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만 쏠린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호리호리한 몸매, 곱고 우아한 얼굴에 길고 얇은 목, 짙은 회색 빛 눈동자에 특히, 당시 이탈리아에서 보기 드물었던 금발머리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죠. 당시 피렌체처럼 매우 세련되고 교양이 넘치며, 철학적이고도 회의적이었던 복잡한 문화의 도시에서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던 그녀가 미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에는 메디치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제시해야 하는 수장의 의무!
당대 최고의 예술가, 시인, 철학자 및 지식인들로 가득했던 로렌초의 궁정은 당시 신플라톤주의* 푹 빠져있었습니다. 로렌초는 피렌체를 고전 세계의 황금기로 다시 되돌려놓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세계였죠.
예술가, 시인, 철학자 및 지식인들은 로렌초의 문화클럽에 다들 모여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에 열중했습니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로렌초가 제시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바로 시모네타였습니다.
자신의 시대에 새로운 돈나 안젤리카타{Donna Angelicata}**를 세워줘야 할 의무가 있었던 피렌체의 수장은 시모네타에게서 자신들의 철학적 이상형을 보았죠.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동생 줄리아노가 있었습니다.
이 메디치 형제로 인해 시모네타는 '피렌체의 아름다움'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곧 미의 기준이 되었죠.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시모네타{La bella Simonetta}'라 불렀습니다.
* 신플라톤주의 - 플라톤 철학의 계승과 부활을 내세우며, 고대 신화(그리스 철학)를 기독교 사상에 연결시켜 미에 대한 탐구는 곧 아름다움을 창조한 신에 대한 연구라는 입장
** 여성을 완벽함의 상징으로 제시하는 르네상스의 주제
당시 메디치 궁정에 살았던 학자 겸 시인 폴리지아노는 이러한 군주의 취향을 바로 알아봤습니다. 폴리지아노는 로렌초의 문화 개혁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 중의 하나로, 그녀를 탄생부터 신비롭게 만들어주었고 시 속에서 그녀에게 자연의 여신 같은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시모네타의 신화'를 조장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중 1475년, 그녀의 명성이 폭발한 사건이 일어나죠.
토너먼트의 여왕
당시 사람들이 열광한 장르는 '기사도적 로맨스'와 '플라토닉 사랑'이었습니다.
숙녀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기사들이 용맹하게 싸워주길 바랬습니다. 출전하는 기사들에게 여인들은 자신의 손수건이나 부착형 소매를 달아주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플라토닉 사랑'도 꿈꿨죠. 기사라면 누구나 한 명씩 짝사랑할 아름답고 덕이 높은 귀부인을 정해놓고 그녀를 위한 사랑의 소네트를 쓰고, 그녀의 미덕을 찬양하는 시를 헌정하면서 '그런 나'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열린 조스트라{Giostra(마상 창 시합)}에서 그들이 원하는 두 스토리가 모두 담긴 드라마 한 편을 목격하게 되죠.
1475년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Santa Croce}광장에서 열린 조스트라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간의 동맹 체결을 축하하는 일종의 기사 토너먼트로, 상인이자 은행가 출신인 로렌초는 사회적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귀족적인 의식을 활용했습니다.
21살의 줄리아노는 말 위에서 보석으로 장식된 눈부신 은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무기와 깃발을 든 채 입장했습니다. 베로키오{Verrochio}가 만든 흉상에서 출전 당시 착용했던 갑옷 그대로의 늠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손에 든 깃발에는 보티첼리가 그린 - 하얀 드레스에 무기와 갑옷을 걸친 아테나 여신으로 묘사된 시모네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여신의 발 밑에는 프랑스어로 모토가 쓰여있었습니다.
La Sans Par
모토는 '비교할 수 없는 미덕'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모네타가 기혼녀였기 때문에 그녀를 향한 줄리아노의 순수한 사랑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림 속 아테나 여신은 갑옷과 무기로 정조를 지키고 있었죠.
피렌체 사람들이 사랑했던 미혼의 젊은 왕자 줄리아노는 특히 토너먼트에서 빛이 났습니다. 그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역사에도 '줄리아노의 조스트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동안 조용하고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았던 시모네타는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며 기쁜 마음으로 줄리아노를 축하했고, 그는 그녀에게 승리를 바치며 외쳤죠.
이는 당시 사람들이 푹 빠져있던 기사도적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말로만 무성했던 그들의 플라토닉 했던 사랑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기도 했죠. 메디치가문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그녀의 명성에 더욱 기여했습니다. 시모네타의 명성은 폭발했습니다.
조스트라 이후 시모네타는 공식적으로 북부 이탈리아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는 15세기 후반 여성들의 이상형이 되었으며, 남자들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사랑에 빠졌죠. 유명했기에 더 유명해진 그녀는 실로 '비할 데 없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했던 시인 폴리지아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줄리아노의 승리와 메디치 가문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줄리아노와 시모네타를 주인공으로 한 찬사의 시를 씁니다. 줄리아노가 승리한 후 시모네타에게 승리를 바치는 모습에 영감을 받아 쓴 이 시에서 시모네타를 님프의 모습으로 묘사하여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미합니다.
폴리지아노는 시 속에서 님프의 모습을 양식화했는데..
희고 장미 빛 얼굴, 금발의 머리카락, 낮은 신발(맨발)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폴리지아노는, 이런 순수한 모습의 여인에게 스캔들이 있다는 암시 한 스푼도 넣었습니다.
시인의 재능은 여기에 있었죠. 그는 작품 속에서 - 순결한 여인의 모습에 귀부인의 관능적인 매력을 첨가하면서, 이를 비난할 수 없는 미덕 또한 결합하는 방식으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이렇게 시모네타를 순결하면서도 관능적인 여인으로 묘사한 폴리지아노의 시는, 이후 화가들이 그녀를 묘사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글로만 존재하는 보티첼리가 그렸다는 깃발 속 얼굴은 시모네타가 확실할 가능성이 크지만, 사라진 지금 확인할 방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정확한 얼굴은 알 수가 없죠. 오늘날 알려진 명화 속 그녀의 모습은 거의 모두 사후에 그려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녀를 직접 본 적조차 없죠.
그녀가 피렌체에 머물 때부터 보았던 시인 폴리지아노와 동시대 피렌체 화가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와 보티첼리만이 그녀를 진짜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폴리지아노는 그녀에 대한 시와 글을 남겼고, 기를란다이오와 보티첼리는 시모네타일 가능성이 높은 여인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시모네타의 전기에 따르면, 남편인 베스푸치가족의 교구였던 피렌체의 온니산티{Ognissanti}교회 속 기를란다이오가 그린 벽화에서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고 있는 베스푸치의 가족 중, 분홍색 망토를 걸친 여인이 바로 시모네타입니다. 벽화의 제작 연도는 1472년경으로, 결혼 후 약 3년 뒤의 모습이죠. 베스푸치의 가족이라는 것 외에는 정보가 없으니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녀일 것으로 꼽히는 가장 신빙성 높은 그림입니다.
그녀의 의상은 아직 중세 후기의 영향을 받은 드레스 코타{Cotta}로 주로 여름에 입은 긴 드레스입니다. 원피스형 드레스의 넉넉한 품은 가슴 아래 부분에서 벨트로 조여 여성스러운 라인이 드러나 교회가 싫어했습니다.
코타는 그 자체로도 외출복으로 입을 수 있었지만, 교회가 싫어해서인지 시모네타는 위에 망토를 둘러 입었습니다. 당시 유행이었던 곱슬거리는 옆머리에, 중세시대의 미의 기준이었던 넓은 이마, 또렷한 이목구비에서 우아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높아지는 명성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그녀의 앞날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의 아름다운 죽음, 비탄에 빠진 도시
신에게 사랑받은 사람은 젊어서 죽는다
당시 피렌체 인본주의자들 사이에 잘 알려진 그리스 극작가 메난드로{Menandro}의 인용문처럼, 조스트라 이후 공식적인 피렌체의 '미의 여왕'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시모네타는 토너먼트 1년 뒤에 사망하고 맙니다. 보통 결핵이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새로운 조사에 따르면 뇌하수체 선종을 앓다가 종양의 부피 증가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육체적인 죽음보다 아름다운 것의 사라짐에 집착했죠. 피렌체 시민들에겐 마치 짧게 끝나 아름답게만 남은 첫사랑과도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도시 전체가 충격과 비탄에 빠졌고, 그 아름다움은 죽어서도 전시가 되어야 했습니다.
로렌초는 그녀의 장례식조차 하나의 이벤트로 꾸몄습니다.
연대기에 따르면, 장례식날 그녀는 꽃으로 덮인 가마 위에서 흰 드레스를 입고, 병과 죽음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외적으로 관 뚜껑을 연채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도시를 행진했다고 합니다. 애도하는 수많은 군중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녀를 따라 무덤까지 갔죠.
이는 이러한 이벤트를 통해 피렌체의 단결을 강조하고, 하나의 감정으로 통합된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수장 로렌초의 전략이었습니다. 치료를 위해 의사를 보내주기는 했지만 정작 장례식엔 참석하지 못해 보지도 못했던 그는, 시모네타의 장례식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마치 보고서처럼 남겼습니다.
모두 그녀를 보기 위해 경쟁했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죽음에도 더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놀랐고, 이전에 그녀를 몰랐던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움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며 후회했다
그녀의 죽음을 기리며 썼다는 유명한 소네트(14행시) 또한 앞장은 토스카나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옹호로 시작되죠. 사실 로렌초에게 시모네타는 자신이 일군 피렌체의 정치와 문화적 업적을 홍보하는 수단에 더 가까웠습니다.
반면, 그녀의 죽음에 진정으로 좌절하고 슬퍼한 이가 있었으니...
시모네타를 진정으로 사랑한 줄리아노는 그녀의 죽음에, 자신이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불행한 청년이라 스스로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시모네타의 자취가 남아있는 그녀가 살던 집에 자주 찾아가 그녀를 추억하며 남은 가족을 보살폈습니다. 오죽했으면 시모네타의 남편과 시아버지가 그녀의 남은 옷과 초상화를 그에게 모두 주었을 정도였지요. 어찌 됐건 이러한 기록 덕분에 적어도 그녀의 초상화가 존재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보티첼리는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Adorazione dei Magi}]*에서 메디치 가족과 자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시모네타가 막 세상을 떠난 후 그린 이 그림에는 슬프고 우울한 표정의 줄리아노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온화한 얼굴이 시모네타라는 설도 있습니다.
맞은편에 서있는 로렌초는 반면, 진자주색 바탕에 금으로 화려하게 수놓은 우아한 겉옷인 조르네아{Giornèa}를 입고 있는 젊은 군주의 모습으로, 가슴은 부풀어 올라있으며 권력의 상징인 칼을 꼭 쥐고 있습니다. 자부심 넘치는 태도로 그림 속에서 검을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죠. 그는 옆에 있는 동방박사 말의 고삐까지 쥐고 있는데, 이는 로렌초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메디치 가문을 미화하려는 화가의 의도가 담긴 장치입니다.
* 동방박사의 경배를 모티브로 한 그림에서 메디치 가족을 동방박사와 동반자로 묘사,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시모네타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불확실함
안타까운 죽음에 보태진 줄리아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줄리아노의 짝사랑인지, 아니면 플라토닉 한 사랑이었는지는 모를- 는 시모네타를 전설로 만들어주었으며, 2년 후 줄리아노가 같은 날에 암살당하자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이야기에 신비로움까지 덧붙여 더 큰 의미를 부여하며 애도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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