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정말 내가 원하는 거 맞아?"
"혹시 동생 봤어요? 모다 동생 예쁘지?"
"솔직히 모다가 예쁘지는 않잖아. 그냥 마음이 넓고 좋은 아이지."
내 애인이 대답하면, '아니라고 모다는 아름답다고' 대답할라치면 되묻는다.
"정말? 정말 얘가 이쁘다고 생각해?"
날씬한 몸을 원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그 몸을 원할 때 나는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알기가 어려웠다. 텔레비전을 틀면 사회가 만든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이들이 바글거려서 그런 건지, 광고 때문에 친구가 성형을 하러 가자고 해서 그런 건지, 정말 내가 원해서 날씬해지고 싶은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예전의 유명했던 프로그램 중에 스타에게 성형 전, 또는 다이어트 전 사진을 보여주며 반응을 지켜보는 코너가 있었다. 대부분의 스타들은 과거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사진을 밟거나 찢어버렸다. 다이어트 앱에 들어가서 다이어트 성공 사례를 보아도 같다. 과거 자신을 부정하며 '추한 모습'이라는 레이블을 달아버리는 모습이 대다수다.
그때는 추하고 지금은 아름답다.
과연 그럴까?
TV가 나오고 휴대폰이 대중화되면서 수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예컨대 "하얗고 마른 여자가 화장품 광고를 하는 일은 다른 여성의 아름다움을 비하하는 행위 아닌가요?" "핸드폰을 너무 오래 하면 뇌에 안 좋습니다. 모두 핸드폰 사용 시간을 줄입시다."와 같은 문제점들이었다.
그때는 주변에서도 이러한 수많은 문제제기들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는데, 고개만 끄덕이고 별다른 성과 없이 수많은 문제들은 풀리지 못한 채로 익숙한 일상의 풍광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움을 정형화해서는 안된다는 나의 의견을 말했다가 그건 네가 열등감을 가졌기 때문에 TV에서 나온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나쁜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치면 현대인은 대부분 휴대폰 중독이냐는 질문도 들었다. 근데 맞지 않나. 지금으로 치면 현대인은 대부분 휴대폰 중독이 아닐까(나 포함). 사람들은 '시대가 변해서 기준도 변했다'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난 우리가 그저 무뎌졌다고 생각한다. 몸의 생김새와 얼굴 생김새를 향한 비난이 시대에 따라 변하고 기준이 변한다면 그건 그냥 기준이 아닌 거다. 차별이 변하지 않고 형태를 바꿔 온 거다.
기준은 그대로고 차별만이 형태를 바꿔왔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면 나누게 되는 대화로도 이런 문제점들이 일상이 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예뻐졌다. 이번엔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너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얼굴이 작다느니, 어깨가 넓다느니, 오고 가는 평가의 말들 속에서는 '정상적인 모습'을 규정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어떻게 회사에 가는데 화장을 안 하느냐고 물었다. 정식적인 자리에 참여하는데 화장을 하지 않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맨얼굴로 가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그럼 다른 말로 화장을 하지 않은 내 맨 얼굴 자체가 예의가 없다는 말인가? 상대가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이 모두 달라서 그 규범을 만들고 그 틀로 서로의 존중을 점치려는 시도는 알겠으나, 겨우 어떤 조건들로 서로를 판단하는 일이 정말 우리가 편안한 사회적 분위기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일까.
나는 나대로 예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저 자신의 차별적이고 길들여진 생각이 이제는 자신이 것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상처되는 말을 툭툭 내뱉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말들 뒤에 숨은 그들의 생각이 정말 그들이 도출해낸 생각이었을지, 사회가 만든 아름다움의 기준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내재화했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지만 그 딴 건 자신만 알 뿐이다.
정말 이게 그들의 생각인지, 사회에서 영향을 받아 갖게 된 생각인지 알게 되면 내 분노의 대상을 그들이 아닌 사회에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각자의 마음의 각자의 것이었으므로.
이런 상황을 거의 일생동안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충격을 받는다.
가장 충격적일 때는 상상치도 못한 사람이 차별적인 생각을 드러낼 때였다. 특히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차별적인 생각의 윤곽을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낼 때 나는 언제나 전과 같이 충격을 받았다.
내 옆 방에는 스님이 한 분 사셨었다. 나는 그분을 참 좋아했다. 언제나 그분의 방에 가면 휴식을 취하고 온 기분이었다. 마음이 사무치게 외로울 때 그분의 방에 가서 대화를 나누고 오거나 차를 좀 마시고 오면 외로움이 진정되었다.
나는 그분이 참 좋았지만, 늘 마음속에는 어떤 불편함 같은 게 있었다.
어떤 대화를 할 때, 그분의 말속에서 어떤 우월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자신이 신과 가까운 존재라는 믿음에서 오는 우월감이 슬쩍슬쩍 보이고는 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말과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말투에서 나는 가슴 한편이 자꾸만 불편했다. 하지만 그분이 그런 마음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나의 차별적인 시선으로 그분을 바라보았기에, 스님은 어떤 깨우침을 가진 완벽한 존재라는 차별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기에 나는 내 속의 기분을 묵살해버렸다.
졸업식에는 가족 대표로 동생이 오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동생을 본 스님은 나를 한 번 동생을 한 번 쓰윽 보더니 말했다.
"동생이 너보다 눈도 크고 마르고 예쁘네?"
오목조목 동생이 나보다 '이게 낫다' '저게 낫다'는 말로 나는 또렷이 맡았다. 언젠가 가슴 한 켠에 남았었던 그 찝찝했던 공기. 자신은 많은 걸 아는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듯이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맡았던 그 말투, 공기.
그 또렷하고 불편했던 공기는 비교를 통해 높낮이를 따지는 차별의 공기였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충격에 그날, 졸업식 날 밤에 얼마나 울었는지를 모른다.
네 동생은 예쁜데 너는 왜 안 예쁘냐는 차별적 발언은 나를 향한 발언이기도 했거니와, 나의 동생을 향한 발언이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한 존재이고 싶은 적이 없고, 나의 동생도 외모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어 한 적이 없다. 결국 추켜세워주는 쪽이던 내려 까는 쪽이던 차별에 대상임은 마찬가지다.
나는 자라면서 엉덩이가 납작 엉덩이라거나, 살이 뒤룩뒤룩 쪘다거나, 살 좀 빼라거나, 나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은 거의 매일 들으면서 자랐다.
늘 사람들에게 차별적 평가를 듣고 나면 나는 헷갈렸다. 특히 화장을 하거나 나 자신을 치장할 때마다 내가 화장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화장을 하는 건 내가 즐겁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에게 던져진 차별적 언행이 틀렸음을 인증하기 위해서인가. 예의 없지 않기 위해서인가. 사람들이 나에게 추하나고 말해서 내 추함을 가리기 위해 한 화장인가. 내가 그들에게 아름답다는 걸 인정받기 위해서 한 화장인가.
나는 평가의 말들이 낸 가슴의 흠집 앞에서 의문했다.
"대체 나는 왜 화장을 하는 거지?"
"나는 정상이 아닌가?"
"나는 아름답지 않은가?"
"꼭 이렇게 기준에 맞게 날 꾸며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인식이 되는 걸까?"
"내가 인증하려는 아름다움은 어떤 아름다움인 걸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다. 누군가에게 인증하려고 사는 삶은 싫다. 그럴 바에, 누군가에게 예쁘다고 인정받기 위할 바에는 화장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즐거워서 하는 화장을 하고 싶다. 하지만 자꾸만 들어온 차별의 말들 때문에 나는 여전히 어떤 늪에 갇힌 기분으로 분칠을 하고 밖으로 나가 의구심을 품은 채로 하루를 보냈다. 가끔 화장실에 가서 내 모습을 확인하면 그저 나의 의구심을 확인할 뿐이다.
"이 화장. 정말 내가 원해서 한 화장 맞아?"
그런 마음으로 화장을 한 날, 조금이라도 칭찬받으면 마음이 미운 일곱 살이 되어버린다.
"와. 너 정말 예쁘다."
'예뻐? 뭐가 예뻐? 네가 '너'라고 칭한 '내가' 진짜 '나' 맞아? 넌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잖아. 넌 날 모르잖아.'
나의 이런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당연히 무뎌진 마음에 들어온 나의 날카로운 감정이 불편하다. 나의 의구심이 화살이 되어 날아가면 누군가 말한다.
"칭찬이잖아. 칭찬을 뭘 그렇게 까탈스럽게 받아들여?
그럼 넌 뭘 원하는데?"
어쨌든 네가 한 인정은 내가 아름답다는 게 아니라, 사회의 기준에, 우리가 학습되어 온 기준에 부합함을 칭찬하는 인공적인 말일뿐이다.
그날 밤에 나는 화장을 지웠고,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나는 의구심들 속에 갇혀 나 자신의 존재와 사랑받을 가치에 대해 의심했다. 의심했던 나날들 끝에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불러온 그거. 정말 아름다움 맞아?"
넌 내게 뭘 원하느냐고 물었고, 난 그 질문을 오래 생각했다. 이제 난 안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내가 정상이라는 것,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나는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일이 정상적인 일이기를 바란다. 모두의 아름다움이 있는 그대로 존중되었으면 한다. 차별이 될 수 있는 평가의 말이 사라졌으면 한다. 너의 다름이 틀림이 되어버리는 생각이 예민하게 관철되었으면 한다.
나는 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만약 당신이 나에게 그게 가능이나 하느냐고 묻는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그게 왜 불가능 한지. 지금 당신 스스로가 한 생각이 정말 자신이 한 게 맞는 건지. 혹시 지금까지 해왔던 생각은 사실 무뎌지고 편안해지며 생각의 자유를 빼앗긴 건 아닌지. 차별은 삶 속에 너무도 당연한 모습으로 비웃기라도 하듯 곳곳에 숨어 있다.
나는 의문한다.
"그거 정말 네가 원하는 거 맞아?"
당신도 한번 질문해보았으면 좋겠다.
"그거 정말 네가 원해서 한 생각 맞아?"
정말 당신이 원해서 한 생각일까. 나는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그보다도 더 멋진 존재이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무뎌지는 대신 예민해지기를 택해야 한다. 관철하고 관찰하고 훑어보며 알아가야 한다. 나누고 투쟁하고 배우고 나아가야 한다. 내 속의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으므로.
그리고 앞으로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나가 볼 예정이다.
"그거 정말 네가 원하는 거 맞아?"
내가 가진 생각이 정말 나의 생각이 맞는지 알아가 보자.
그 부단한 싸움들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림과 사진 출처 모두: 프리-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