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채기
강요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 한 번도 내 말이 “아. 그렇구나. 너는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부모님은 나를 멋진 아이로 키우고 싶어 했다는 거다. 나를 잘 키우시고 싶은 마음은 '사랑의 매'와 '비난'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나를 많이 때렸고, 아빠는 나를 많이 비난했다.
그때는 매 맞는 일이 당연했다. 나를 포함해 주변의 모든 아이들이 매를 맞으며 자랐다. 부모님에게 맞고, 선생님에게 맞았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 처음으로 키가 정말 큰 영국 선생님을 만났는데 두려웠다. 난 키도 덩치도 있는 편이어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나보다 월등히 거대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을 보고 나는 두려웠다. 선생님은 좋은 사람인데 나는 왜 이러나 싶어 생각해보니 내 어릴 적 나보다 월등히 큰 어른들은 나를 때리고 비방하는 사람들이어서 나는 그 선생님을 통해 자꾸만 내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게 되어 그런 거였다.
마치 해일이 나를 덮고 어두운 바닷속으로 데려가는데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않으려는 듯했다. 사무치게 슬프고 외로운 기분이었다.
엄마는 나를 멍이 들 정도로 때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에 보라색 줄 무더기를 만든 건 선생님들이었다. 나는 엄마게에 멍이 들 정도로 맞지 않았지만 정말, 정말, 많이 맞았다. 거의 매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몸에는 멍이 들지 않았지만 내 가슴에는 멍이 들었다. 한 번은 사람들이랑 다 같이 있으면 날 때리 않겠지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다 같이 있을 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공중 화장실로 데려가서 때렸다.
무기력했다. 언제 어디서든 하지 말라는 건 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늘 까치걸음으로 걷듯 조심해야 하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쌓여가는 분노를 연필을 부러뜨린 뒤 재빨리 엄마가 보지 못하게 장롱 뒤켠에 숨기는 일뿐이었다.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
부모님은 두려움이 많으신 분들이셨다. 나의 작은 실수가 부싯돌처럼 부딪치면 작은 불씨에 두 분의 마음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한 여덟 살쯤, 부모님 친구 딸이 자기가 피아노를 어찌나 잘 치는지 자랑을 해서 어린 마음에 나도 친구 있는데, 걔 피아노 엄청 잘 친다고 자랑을 했다. 그날 누구 앞에서 자랑을 했다고 얼마나 혼이 나고 비난받았는지 모른다.
한 열 살쯤, 큰아버지와 책방에 가서 내가 책을 읽고는 “이 책 정말 재밌어.”라고 해서 혼났다. 큰아버지 있는데서 그렇게 말하면 그 책을 사달라는 행동이 아니냐고 하면서. 네가 그러면 상황이 이상해진다면서 아버지는 나를 비난했다.
이런 비난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넌 그래서 안돼." "아휴. 쟤가 우리 안 좋은 것만 가지고 있네." "넌 너무 착해서 결국 이용받을 거야." "살 좀 빼고 예뻐지고 영리해져야지 성격이 왜 그러니 너는 문제가 있어."
아무도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다. 아니. 죽고 싶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진짜 '나'를 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늘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려는 말과 다른 진짜 나를 말이다.
사람들은 나의 성격과 나의 모습을 규정했다. 주로 나에게 너는 성격이 이래, 너는 이런 사람이야, 너는 못생겼어, 너는 멍청한 인간이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거울을 볼 때 내가 본 건 당당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왜 아무도 이런 나를 보지 못하는지 의구심이 들었고, 그 의구심은 원망이 되었고, 그 원망은 분노가 되어 날 집어삼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는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날 아프게 했던 것 같다. 그러한 강요와 비난이 나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내 영혼을 갉아먹은 자리를 채우고 들어왔던 거다. 나의 미세한 생각 하나 행동 하나 말투와 표정 하나로 혼이 나는 기분은 본능적으로 하는 거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검열받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이가 없어서 나는 자서전과 자기 발전류의 책을 읽으며 가상의 어른을 만들었다. 그리고 책이 하는 말을 가상의 어른이 나에게 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자라면서 나는 단 한 사람도 제대로 된 어른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진짜 그렇게 생각했고, 절대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다. 어른들은 아이인 나에게 기댔고,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아이였다. 내가 지금 어른이 되어서 가장 슬픈 사실 중 하나는 어린아이 일 때 아이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꾸만 혼이 나고 비난을 받는 부분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말을 삼가했다. 어차피 말을 하면 내가 한 말이 또다시 약점이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에게 생채기를 낼 테니까. 비난받을 테니까.
한 열 살쯤, 큰아버지는 내가 재밌다고 한 책을 사 주셨다. 그 책은 효도에 대한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어린 마음에 엉엉 울며 생각했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건 엄마 아빠가 아니라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건 엄마 아빠의 상처라고. 두 분도 사실은 나에게 상처 주고 싶어서 주는 게 아니라고 나는 나에게 계속 주문을 걸었다.
삶이 너무도 정신없이 아프게 흘러갔다. 나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는 나의 이야기를 조금씩 내가 믿는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나의 오랜 고등학교 친구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는 입을 벌리며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너의 행동이 전부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나의 오랜 중학교 친구는 네가 늘 해맑아서, 그런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대학교 친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나면 말할 생각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이야기를 하는 행위 자체가 부모님을 겨냥해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분을 비방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나에게 이런 상처가 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너무도 오랜 시간 함구했어서 선명한 글자들로 적어 내리고 마주 보고 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채하며 지나치고 싶지가 않았다.
슬픈 이야기란, 상처받은 마음이란, 하면 할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옅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난 이 마음을 물에 풀어 옅게 만들기 위해서 오늘 처음 풀어놓고 몇 개를 골라 이 종이 위에 조심스레 적어보았다
언젠가 아버지는 두려운 마음이 드셨는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잊으라고 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잊으라고 했다. 잊으라는 말에 나는 "그건 내 권리고, 내 마음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했지만 얼마나 심장이 뛰고 피가 뒤틀렸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잊으라고 해서 심장이 뛰었지만, 나는 내가 할 말을 해서 기뻤다. 함구하지 않아서 기뻤다. 보통 때처럼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기뻤다.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포기했었다. 포기해야 아프지 않을 것 같아서 놓아버렸다. 포기하고 나니 내가 쥐고 있던 게 환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덜 아팠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얼마 전부터 아버지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절대 아버지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생각이나 기대조차 하지 않는 정도에 다다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한참 전부터 친절해진 아버지에게 감사했다. 비록 앞으로도 이럴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나는 한참 동안 친절해진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버지."
엄마와는 어느 겨울날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격해진 말투로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냈다. 엄마에게 나는 격해진 마음을 말했고, 생각보다 엄마는 훨씬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이해했다. 드디어. 나의 고통을 이해해줬다.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는 내게 사과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나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엄마는 말씀하시고는 했다.
"내가 널 너무 때려서... 내가 정말 너무 미안해... 미안해. 모다야... 엄마가 미안해."
"괜찮아 엄마. 엄마도 어렸잖아. 나 점점 괜찮아지고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사과해줘서 고마워. 나 이제 점점 괜찮아지고 있어."
이제는 친구가 되어버린 엄마고, 나에게 친절해지기 위해 애쓰시는 아버지이다. 두 분의 노력에 감사하다. 앞으로 우리가 더 많이 더 따듯한 추억을 많이 쌓다 갔으면 좋겠다. 나의 과거를 말하는 일을 결코 비난하는 일과 동일시할 생각이 없다.
과거는 과거이지만 짚고 마주 보아야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내가 이 글을 쓰는 사실이, 지금의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난 이제 앞으로도 나의 상처와 기억과 경험을 꺼내놓고 마주할 계획이다.
(사진 출처 모두: 프리-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