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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다 Aug 28. 2022

삶이 깊어지는 어떠한

어떠한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것과 함구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했을 때 오는 여파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난 오랜 시간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해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았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꼭 모든 걸 다 말해야 될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서 누군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어쩌면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게 아닌가도 싶어. 하지만 이런 누군가의 고백과 사실에 대해 이야기함이 또 때로는 진실을 알아야 할 때 굉장히 좋은 계기가 되지.


난 내 연인이었던, 내가 한때 온 마음을 바쳐 믿었던 이가 나의 혈육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어.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때 우리가 했고 겪었던 일들을 기반으로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해. 저 사람이 팔이 잘렸어. 근데 난 팔이 잘리는 고통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잖아. 대신 나는 손가락을 베어 본 적이 있어. 그래서 그 고통을 기반으로 팔 잘린 이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깊이나 정도에 대해서는 절대 알 수 없어. 나는 이 구간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나는 내가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나의 거대한 착각이었더라.


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길 바랬나 봐.     


나는 그 다르다는 거를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아.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 그건 공감을 바라는 어떤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어. 하지만 우린 개개인의 다른 생명체고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인격체인걸? 그래서 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좋아. 누군가에게 이게 맞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랬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대화를 하면서 너는 그랬구나를 이야기하는.     


내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의 편견을 보고는 해. 내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가 있는 거지. 왜냐면 우리는 모두가 다 다르니까.      


언젠가 당신의 연인이 당신의 혈육에게 성적인 끌림을 아주 오랜 시간 겪어왔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은 당신의 세상 전체를 무너뜨리고 지옥으로 끌어내릴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나의 연인이었던, 내가 너무도 믿고 사랑했던 그로부터 들어야 했고, 그래서 내가 이만큼이나 아프다고 이야기할 때. 그가 나에게 얼마나 잘했는지를 이야기할 때. 어떤 친구가 그러더라. 원래 바람피우는 남자들은 본처한테 잘해.      


나는 그 애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내 연인이었던 그 애는 바람을 핀 적이 없어. 난 그런 무심한 말들이 싫어. 그 애는 마치 나보다 자신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겪었고 안다는 양 겪어본 적도 없는 것들을 자신이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양. “원래 세상은 그래.”라며 자신이 지식으로 습득하고 들어서 아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어. 지식을 나열하는 태도로 말이야. 그녀는 나의 이야기의 0.001%밖에 모르는 데 말이야. 난 그러한 미성숙하고 얕은 태도에 상처를 받기도 해.  


하지만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나니까. 그분, 바람피는 남자는 본처에게 잘한다는 말을 한 그분은 또 내가 모르는 어떤 고통 속에서 그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고통 말이야.


근래에 고통에도 정도가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면서 다른 모든 이에게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들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깊이가 있는 것처럼. 


난 우리가 자신이 겪었던 것을 기반으로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고통은 더 많은 걸 이해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해. 고통은 삶이 깊어지는 과정 중에 꼭 필요한 것인가 봐.


나는 상대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렇지 않더라. 다만 이러한 능력,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우를 범하지만 않는다면 이것은 알 수 없는 상대의 어떤 것을, 어떤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해주는 마음의 문이 될 테니까. 난 그래서일까. 끊임없이 판단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꼭 입 밖으로 전부 내뱉거나 이야기하지 않더라고 말이야. 끊임없이 생각하고 알아가는 과정은 필히 겪어야 하는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과정인 것 같아. 그래야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더듬고 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검은 어둠 속에서 형체를 알아가려는 사람처럼 말이야.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야.’ 정의 내리는 말들이 거북스러웠어. 내가 워낙 강요를 많이 받으면서 자라서 그것을 엄청난 강요로 받아들였어. 그 사람이 ‘이것은 이래. 저것은 저래.’라고 할 때 대부분이 강요인 경우가 많았거든. '그러니까 넌 내 규칙을 따라. 이것이 옳으니까.'와 같이 말이야. 하지만 때로는 그 속뜻이 나의 이해와 다를 때도 있었어. ‘내가 여러 책을 읽고 경험하고 이해도를 높이고 나니, 이것의 형태는 이것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난 너의 의중을 존중해. 그저 나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라면 난 그 말을 언제든 환영해. 네가 나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강요만 아니라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로 우리의 마음속 세상을 더 넓게 넓혀갈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난 이제 누군가가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야.’ 정의 내리는 말을 하면 그 속뜻을 잘 이해하고 가려듣는 연습을 해.     


솔직히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고통을 이야기할 때 내 이야기를 듣는 이 사람이 이렇게나 나의 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충격을 받고는 해. 어떻게 내가 견디고 견디는 이 고통의 깊이를 이 사람은 모를 수 있을까 생각할 때는 괜히 화가 나고 억울해지기도 해. 그런데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 고통이 내 삶의 깊이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걸 이해하게 해 준 것 같아.      


상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난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했었어. 그들의 고통, 그들의 고통의 깊이, 그런 것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고통에는 어떤 깊이감들이 갖가지 존재하기 마련이고,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고통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제는 알아. 그리고 고통을 겪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나의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 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면서 세상은 좀 더 넓어진 것 같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도 같아.


그러니까


고통을 겪는다는 건 내 삶과 내 자신이 조금 더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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