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으로-
조금씩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어쩌면 오늘은 나를 좋아하는 이들이 놀랄법한 또 하나의 고백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어떤 한순간의 경험으로, 그 경험이 있기까지의 여러 느낌과 생각들이 딱 한 순간 시발점이 되어 삶에서 값진 깨달음을 주는 게 아닐까.
시간은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줄곧 관심을 가진 그 남자가 여자 친구와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다. 관심을 꺼야겠다고 말을 했으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 난 뒤돌아서 지하철을 기다리다, 지하철을 타고 가만히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느꼈다.
지하철에 가만히 앉아 고통을 느끼는데... 이상했다. 고통이 꽤 나쁘지 않았다. 전이라면 이 고통을 외면했을 것이다. 됐어. 이제 됐어. 라면서. 다른 사람 좋아하면 돼. 라면서. 나의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다른 남자를 찾고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난 내 감정을 마주 보았다.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아파?
마주 보고 나니 사실 견딜 만큼 아팠다. 자꾸만 외면할 때는 이것이 견디지 못할 만큼의 고통스러운 마음이라고 여겨졌는데, 이 고통이 내 생각보단 작았다.
몇 달 전, 민들레는 나에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섬에서 만난 민들레의 친구는 자신이 사귀었던 전남자친구를 두고 “그냥 장난이었죠. 뭐.”라고 했다. 그 애는 우리 동생과 꽤 닮았는데, 내 동생에게서도 그 뒤로 그런 소리를 자주 듣고는 했다. “그냥 장난인 거지 뭐.”
그들이 말하는 ‘장난’인 ‘만남’. 난 그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대체 어떤 만남이 장난인 만남일까? 그 애들이 말하는 장난 같은 만남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하룻밤 만남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몇 달, 몇 년을 만났어도 ‘장난’으로 밖에는 치부되지 못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실은 그 뒤로도 그 말은 내 가슴에 꽤 오래, 몰래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말이 이해하고 싶었나 보다.
장난. 오고 가는 눈빛, 잠깐의 스침.
한때 나는 그것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남이 쉬웠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정해놓고, 그 사람이 가질만한 모습에 어울릴만한 남자를 찾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 남자가 내가 정해둔 그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헤어졌다. 하지만 이런 것이 과연 사랑일까?
언젠가 어떤 오빠가 한 “우리 모임의 여러 남자애들이 너 때문에 헷갈리고 힘들어하니, 네가 우리 모임을 나가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듣고 난 그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잘 생각해보니 그때의 내가, 그때의 내가 가진 마음가짐이 그의 말과 다름이 없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난 내가 하는 행동들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고 상대가 나를 평생 잊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 꽤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못된 심보이며 그것은 미성숙함이었다.
언젠가 성인이 되어 다닌 영어학원에서 날 순수한 마음 그대로 사랑해주던 선생님이 있었다.(이성의 마음으로) 그의 시선은 늘 나에게 머물렀고, 나를 보면 미소 지었다. 그가 그러기 시작한 건 우리가 알고 지낸 지 꽤 된 이후였다. 그는 언젠가 학원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I love you”라고 했다. 난 그의 고백을 기억하고 있다. 비록 그 말, “I love you”라는 말을 한 순간 학원장님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파티 도중 술잔을 쳤고, 하필 그가 그 말을 한 순간 주위가 조용해져서 그의 말이 너무도 또렷이 공중에 떠올랐어도. 비록 그 기억이 그에게는 이불속에서 허공 발차기를 불러일으키는 기억일지라도. 내 가슴에 그의 그 고백은 아직까지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가 나를 만나고 나서 바로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알게 되고, 그 진짜인 내 모습을 사랑해주었던 거여서. 난 그 말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다.
솔직히 난 사랑이란 걸 몰랐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거대했으나, 사랑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장난. 오고 가는 눈빛, 잠깐의 스침.
과연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D를 만나고 난 뒤로 사랑을 대하는 내 모습이 변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세 남자를 만나며 서서이 내 태도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D와의 헤어짐 후 첫 번째로 만났던 분은 친구가 마음 회복을 하라며 소개해준 분이었다. 그분은 정말 좋은 남자였다고 난 생각한다. 자상하고 친절하고 분명 따스한 마음을 지닌 남자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이 어떤 남자인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연애를 하면 자신이 맞춰준다고 했다. 자신이 살면서 연애를 한번 해보았는데, 그 기간도 길지는 않다고 했다. 그런 것이 연애에서 무슨 소용이냐고 예전에는 생각했지만, 사랑 속에서 자신을 경험하지 못한 이의 이해도가 낮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나로 인해 느껴지는 떨림과 설렘에 기분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몰랐다. 그저 한 번의 작은 설렘과 충족스러운 외적 조건 같은 것에 더불어 성격까지 나쁘지 않은 듯하여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게 이 사람을 향해 맘껏 하라고 윤허하는 일이 정말 사랑일까?
물론 많은 사람이 그러겠지만, 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술을 마시며, 자신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신도 그렇지 않으냐며 자신의 전 연애를 짧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할 때, 난 웃으며, “그렇죠.”라고 대답했지만 D와 만난 그의 가족, 핀란드, 스웨덴,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 숨결, 사랑했던 순간들이 아주 짧은 그 한순간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물이 울컥 차올랐지만 고개를 떨구고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난. D를 만나고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걸 다시 한번 마주해야 했다. 사랑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이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에게 "그래라." "저 사람에게 네 마음을 바쳐라."라고 말해버렸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난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그럼에도 어떤 만남이 장난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얼마 뒤에 친한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했지만 만나지 않은지는 몇 년이 지난 채였다. 의도치 않게 만나서 영화를 먹고 술을 마시며 지난날을 나누다가 그 애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고, 나도 그 애도 서로의 몸을 탐하고 싶었다.
난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그것을 원하는지. 장장 12년 친구 기간도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 가슴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알기에, 가슴에서 떠오르는 감정들을 잘 들여다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찾던, 이 애와 나눌 수 있는 마음이 그 마음이 아니라면 한 순간의 욕정으로 돌이키지 못할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 이 애가 내 가슴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남자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애는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그 애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선을 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니, 친구가 한숨을 쉬며, “정말 다행이다”라고 했고, 민들레는 “동창은 남자 리스트에서 빼”라고 했다. 난 민들레를 사랑하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전에 알고 지내던 프랑스 남자애가 한국에 왔다며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했다. 그 애의 말에 흔쾌히 대답했고, 그것이 데이트인지 친구로서의 만남인지는 정확하지 않은 채로 음식점에 갔다. 식당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어느새 서로의 몸을 더듬고 있었고, 그 애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이게 맞나?’ ‘이게 맞는 걸까?’
잘 모르겠다는 기분뿐이었다.
그 애는 밥을 먹는 내내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 애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난 정원사는 처음 만나봐서 그 애의 이야기가 모두 흥미로웠지만,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난 그 애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아마 그래서 그 애는 내가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사랑이 느껴지질 않았다. 불장난을 하던 도중 난 여기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는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다음 날 그 애는 나에게 다정히 문자를 했고, 나는 아주 느리게 답장했다. 그리고 그 애에게서 연락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애는 아마 내가 자신을 장난쯤으로 여겼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그 애와의 만남에서 진심이었다. 나는 그 애와 만나며 내 가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바쁘게 살폈다. 그리고 만약 사랑이 느껴진다면 난 그 애를 꼭 붙잡을 생각이었다.
오늘 지하철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던 그 남자가 다른 여자랑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곰곰이 생각하고 보니 난 사실 이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딱 이 마음이 장난이 아닌 걸까. 장난. 잠깐의 스침. 잠깐의 느낌.
난 이제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관심을 가진 그 사람. 그 사람은 키도 크고 멋있다. 나에게 몇 번 친절을 베푼 적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는 그저 내가 사랑이라는 마음을 느끼길 바라는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 모든 건 나의 상상이다. 나는 내 가슴에서 느껴진 것이 그를 향한 진정한 관심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라 상상 그 자체라는 걸 알고나서 생각해보니까 그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모르고, 털끝만큼도 그를 경험해보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은 사랑이 아닌 장난. 장난이었다.
세상에 키 크고 멋진 남자는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난 자꾸만 알지도 못한 채로, 경험하지도 못한 채로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느 순수했던 마음들이 내 가슴에서 어둠을 뚫고 작게 빛나기 시작하는 오늘. 난 사랑이란 상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경험과 시간과 탐구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경험이며, 상대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험하지 않고서 상상 속에 갇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일은 멈추기로 했다.
상대가 진짜 내가 찾던 그 사람일지 아닐지는 이제 경험과 시간에게 맡기도록 해야겠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저 사람이라며 경험도 하지 않고 정해 놓고 만나는 일은 이제 그만 두기로 했다.
미디어에서 정해둔 사랑의 틀에 내 연애를 끼워 맞추는 일도 이제 그만 두기로 했다.
대신 최대한 많은 사람과 친분을 쌓고 자연스러운 나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내 가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살펴보아야겠다.
잘 살펴보다 보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그 사람이 아니라, 진짜 그 사람을 알아보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