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다 Mar 21. 2023

오늘도 나를 조금 놓아줍니다.

나는 느린 사람입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타입이고 반대로 하면 빠른 세상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타입입니다. 여태 내가 느린지 몰랐습니다. 보통 잠시 생각하던 찰나에 상황이 다 지나가 버리거나 느즈막히 당황할 때쯤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가고는 했지만 그게 내가 느린 편이기 때문임을 몰랐습니다.


그때 그렇게 할걸. 지금이라도 말할까. 그건 내가 아닌데. 오해인데.


그런 후회와 미련 속에서 세상에 발맞춰 살아남고자, 덜 후회하고자 가슴속에 대처법을 적어내렸습니다. 매뉴얼 북이 완벽하면 좋으련만 오히려 세상은 나를 그 속에서 바깥으로 끄집어냅니다. 예외의 상황이 자꾸만 나를 세상으로 끄집어냅니다.


예컨대 누가 물었는데.

“커피를 언제부터 마셨어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대학졸업하고 나서요.”


대답할 때만 해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는 그 질문에 생각이 빼앗겨 하루 틈틈이 질문합니다. 정말 졸업하고 나서부터 마셨나?


그렇게 질문하다가, 잠에 들 즈음 생각이 납니다. 아. 나 커피광이었지. 안 자려고 에스프레소 네 잔 원샷도 했었지.


뭐가 문제냐며 이토록 느린 나를 책망했는데. 우연찮은 기회로 심리 검사를 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속도가 남들보다 느리구나. 빠른 척하며 살았는데 아니었구나.


가장 어려운 순간은 짧게 만나는 사람에게 대답을 해야 할 때. 지금이 지나면 오해를 풀기 힘들어져 버릴 때.


넌 이럴 때는 어때? 저럴 때는 어때? 이게 좋아? 저게 좋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 앞에 머리를 쥐어 싸매고 사람들을 만나 답변을 해야 할 때는 고난의 산이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재촉합니다. 빨리 지나가라 빨리.


난 이럴 때는 이렇고, 저럴 때는 저래. 이게 좋고 저게 좋아.


질문에 답할 때마다 대답이 다른 이유로 누군가는 나를 재수 없는 애, 누군가는 나를 이해심 깊은 애, 누군가는 나를 기가 세다거나, 멍청한 애라고 여깁니다.


판단 앞에 서면 시험지를 푸는 기분입니다.


여러 시선 앞에 이렇게 보여야 한다거나, 이렇게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깊어지면 나는 종종 나를 탓했습니다. 난 왜 이럴까. 왜 사람들의 대답에도 잘 대답하지 못하고 잘 지내지 못할까.

그게 아닌데.

오해인데.


물론 지금도 종종 시선 앞에서 움츠러듭니다. 나를 가리기도 합니다. 입아 넌 말해라 난 아무 생각이 없다 하던 계절들이 지나가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양한 이들과 그들의 다양한 인식을 마주하다가 보니 결국 온전히 나를 이해하는 이도 나뿐인 게 아닌가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더, 느린 나를 책망하거나, 재촉하며 무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종종 추운 게 싫다고 말하고, 겨울이 좋다고 말합니다. 마른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좋다고 말하고, 마른나무로 가득한 가을이 싫다고 합니다.


더는 느린 나를 책망하거나, 무시한 채 기다리지 않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내가 그러면 그렇다고 말해주고, 힘이 든다면 기다려줍니다.


내 안에 각각 다른 모습을 용인해 주며 자신과 더 잘 지내는 방법을 오늘도 느리게 배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또, 한 해를 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