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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다 Apr 24. 2023

꽤 괜찮은 순간들-

마음에 들어. 마음에.

#1 느린 걸음..(?)

  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슬렁슬렁 걷는데 빈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가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셨다. 눈치를 채고 이어폰을 빼니 손을 앞으로 흔들며 먼저 지나가라고 하신다.

  "아니에요. 저도 걷는 거 느려서요."

  딱히 빨리 갈 이유도 없고 할머니랑 걷는 속도가 같아서 좁은 인도를 함께 걷게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한 말이 조금 신경 쓰이셨는지 물었다.

  "내가 걷는 게 많이 느린가?"

  나는 종종 걷는 게 느리다는 평가를 많이 받아서 느리다고 한 건데, 아무래도 할머니는 조금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아니에요 할머니. 현대 사회가 빠른 거죠."

  할머니는 안심하시며 "야(얘). 야(예)." 어디 사투리인지 모를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할머니와 나란히 걸으며 할머니와 적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프면 하나도 쓸모가 없어요. 나는 무릎이 아파요. 내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는데, 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어요. 나는 저쪽까지 걸어가는데 산책을 나왔어요. 매일 산책을 해야지. 맞아요. 산책하는 거 정말 중요하죠. 할머니 대단하시네요.

  일련의 이야기가 한 바퀴를 돌고 정적이 이어지자 할머니는 또 한 번 자신에게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다며 하신 말을 되풀이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는데, 할머니가 말동무가 생겨 꽤 기뻐하는 눈치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딱히 근래에 일이 없고 할 말이 없어서. 말은 하고 싶으나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였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같은 대화를 시작했다. 느긋한 걸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할머니의 느긋한 말투와 분위기가 좋았다. 우리 할머니는 잘 지내고 있나. 나는 늙으면 어떤 모습일까 여러 생각을 하면서.

  할머니는 내심 섭섭한지 어디까지 가냐고 여러 번 물으셨다.

  할머니에게 산책 잘하시라고 인사하며 헤어지는데 마음이 어딘가 아련했다. 빡빡한 사회의 삶에서 잠시 벗어 나와 누군가와 느긋한 시간을 보낸듯해 어쩐지 꽤 기분이 좋았다.



#2 쑥

  저번주였던가. 금요일 저녁에 민들레(내 동생)와 엄마 집에 갔는데, 엄마가 쑥 뜯어오면 쑥전을 만들어준 댔다.

  "쑥으로 전을 만들어?"

  나도 동생도 묻자 엄마가 쑥 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단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시골집 고양이가 어느새 현관 앞에서 야옹거린다. 라떼를 들고나가 고양이 밥을 뿌리고 "안돼. 저리 가. 이건 내꺼야." 라떼를 사수하며 낮은 언덕에 자란 쑥들을 바라보며 후루룩 라떼를 들이켰다. 느지막한 아침에 엄마가 깨서 쑥 캐는 법을 알려줘 정신없이 쑥을 캤다.

  밀가루에 물 조금. 자작하게 쑥 넣어서 부치니 세상에 이게 무슨 맛인가. 이 쑥전은 널리 널리 알려져야 한다. 얼마나 맛있는지. 내가 많이 뜯은 것도 양이 적게 느껴져서 다음날은 민들레도 가세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쑥 향이 그리워 죽겠는데. 왜 마트에서는 쑥을 안 파는지 중얼거리며 걷다가 사거리 한편에 정신없이 세워진 자전거들 앞에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쑥을 파시는 게 보였다.

  "할머니. 이거 쑥 얼마예요?"

  할머니 a : 이거? 이거! 두 개(바두기 두 개 가리키며)에 오천 원!

  "그럼 저 두 바구니 주세요."

  할머니 b도 옆에 앉아서 조용히 말했다.

  할머니 b : 내꺼도 사.

  "할머니 쑥은 얼마예요?"

  할머니 b : 하나(한 바구니)에 이천 원!

  "에에? a할머니는 두 바구니에 오천 원인데. 할머니는 왜 이천 원이에요?"

  할머니 a : 내 건 양이 더 많잖어!

  흠. 아닌데. a 할머니 두 바구니 양이 b 할머니 한 바구니 쑥 양인 거 같은데...

  "할머니 삼천 원에 파세요."

  도합 팔천 원에 사 온 쑥 양이 많아서 전부 먹진 못했지만. 마음이 좋았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꽤 괜찮은 순간으로 가슴에 남았다.



#3 허무감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제대로 한 끼 챙겨 먹고 마무리까지 깔끔히 정리하자 반짝이는 싱크대처럼 내 마음도 상쾌하다. 오랜만에 개운해져 고무장갑을 벗었는데. 저녁 먹은 접시와 컵이 식탁에서 방긋 웃는다.

  "안녕? 요리한 거만 치우고 난 까먹었지?"

  부들부들. 그냥 싱크대에 두고 씻으러 들어가다가 오렌지를 사 온 게 기억이나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아. 맞아. 나 오렌지 사 왔지~'

  '씻고 먹어야 하니까 이빨은 닦지 말아야지~ 흠흠.'

  자유로운 영혼인 나의 가족들은 모두 집에 늦게 오거나 안 들어온다는 날. 조용한 집에서 혼자 제이팝 크게 틀어두고 투명 기타를 쳐대며 둥실둥실 씻고 나오며 생각했다.

  '아! 이빨 닦았다!'

  실소가 새어 나왔다. 허무해라 허무해라. 요즘 이렇게 실소가 나오는 순간이면 어쩐지 그런 생각이다. 이렇게 종종 웃을 수 있는 것도 꽤 괜찮은 걸?

  허무감에 한번 실소하는 꽤 괜찮은 어떤 순간.

   


#4 전화

  민들레는 딱히 내게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가끔 전화가 오면 대부분 뭘 부탁한다. 나는 때때로 투정을 부린다. 가끔 필요한 거 없어도 전화 좀 하라고. 오늘은 분명 부탁할 게 없는데 민들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설렌다. 민들레가 내가 보고 싶었나?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설마..

  "여보세요."

  이 새끼 잘못 걸었다. 버튼이 잘못 눌린 게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물었다.

  "여보세요."

  여전히 그녀는 대답이 없다.

  ...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좀 괜찮아지는 순간.



가끔 한번 실소하고, 웃어넘겨버리고, 자상한 마음을 나누는

꽤 괜찮은 순간들을 모으며 살아가고 싶다.

언젠가 모인 풍경을 두 손 모아 바라보다가

뭐야. 꽤 괜찮은 삶이었잖아?

하길 바라며.


그대 삶도 꽤 괜찮은 순간들과 장면들로 가득 모인 삶이길 바라며-

오늘도 생각지 못하게 끄적여본다.




룰루랄라 실소와 애정이 가득한 하루-




Ps - 오랜만에 왔는데 brunch 폰트가 바뀌어서 좀 슬펐다. (감정도 좀 나눠보는 꽤 괜찮은 순간)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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