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은 너를 위한 방이 아닌 나를 위한 방이었다.

정당함이라 불리는 방

by 모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한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하며 내 옆을 스쳐 지났다.

"원하는 게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요구해. 머리 쓰지 말고."

'정정당당.'

'정정당당.'

이상하게 그렇게 꽂힌 말은 내 속에 오래 남아 마음에서 맴돈다. 마치 자신이 머물 집을 지어버린 것처럼. 어느샌가 맴돌던 말들은 내 속에 터를 잡고 내려앉고는 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정정당당'이란 말이 듣기가 좋았다. 합기도건 태권도건 특공무술이건 사부님은 늘 같은 걸 요구했다. 스포츠맨십.

스포츠 정신은 공정하다. 정정당당하다. 패한 사람은 패배를 인정하고, 승리한 사람의 승리를 인정한다. 승리한 사람은 자신이 애써 얻은 결과를 뿌듯한 마음으로 만족한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승패를 떠나서 공정함으로 힘을 바르게 키우는 일이 스포츠 정신이 가진 매력이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고 나와서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데 한 놈이 실실 쪼개며 그런 말을 했다.

"모다야. 우리 시험장에 있는 애들 다 커닝했다? 근데 안 들켰어. ㅋㅋㅋ"

순간 목 뒤가 굳었다.

"... 뭐? 어... 어떻게?"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닷새 밤을 새우다 쓰러지기도 하고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붉은 눈으로 세수를 해가며 준비한 시험이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장난이겠지...'

그놈이 입여는 모습이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아-니. 거어-기이-에 와-이-파-이가... 안-되-는 애-들-은 쵸-콜-렛 포-장-지이-에... 돌-려어-서어..."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놈이 답을 써서 애들에게 돌린 거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학교에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 증거는? 하. 내가 그 시험장에라도 있었으면 바로 시험관한테 꼰질렀을텐데. 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부글부글 끓는 마음으로 위태롭게 길을 걸으며 생각하는데 커닝했다는 무리 중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모다야... 그... 있잖아... 너 룸메 언니가... 그 커닝할 때 너무 종이를 늦게 받아서... 답을 한 개씩 밀려 썼대. 그래서 지금 막 엄청 속상해하고 엄청 울고 있데... 네가 가서 언니 보면 좀 위로해줘..."

머리채를 잡을까 하다 새어 나오는 한숨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 애를 지나쳐갔다. 커닝해서 우는 사람을 뭐? 위로를 하라고? 설마 설마 했는데 룸메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정말로 쳐 울고 자빠졌다. 으앙 으앙거리면서. 나 답 다 밀려 썼는데 어쩌면 좋냐면서.

피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삐그덕 거리는 로봇처럼 물건만 놓고 방을 나왔다.

연필을 부러뜨리며 그놈들을 향해 눈총을 쐈건만 뻔뻔스러움은 끝까지 악질스러웠다. 그 애들은 보란 듯이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부정한 방식으로 학교에 들어온 애들이 학교생활을 정당하게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가다가 지 발에 걸려서 코나 깨지겠지 생각했다.

그 생각은 장학금 순위에 밀려난 이유가 장학금을 받은 동기 하나가 커닝으로 점수를 올렸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걸 동기들끼리는 공공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대체 교수님께 커닝했다고 이야기를 안 한 건지도 궁금했고, 내가 그걸 막지 못했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었다. 그런 태도로 삶을 사는 너희는 아마 좀 불안할 거다라는 생각도 전액 장학금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살았지만 열심히 하지 않은 애들에게 가야 하지 말아야 할 공이 가니 의욕이 꺾였다.

그러던 와중에 가깝게 지내는 중국 교수님께서 부탁을 하나 하셨다. 이번 방학에 한국 교수님들이 오셔서 함께 교수진 모임을 갖는데, 한분께서 아이들을 데려오셔서 하루 동안만 두 아이를 돌봐 줄 수 없겠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그날은 내가 애들을 맡아 돌보기로 했다.

"이모다. 네가 대장이니까.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가서 놀다 와!"

어릴 적에도 사촌 동생들이 많아 자주 애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나가 놀았다. 대장이란 직책도 가족이 임명했기에 책임감이 컸다. 우리 가족은 우애가 깊어서 얼굴도 자주 봤는데, 그만큼 대장 노릇도 자주 해야 했다. 솔직히 나도 애라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애들을 바리바리 끌고 밖으로 나가면 한 놈은 소리 지르고, 한 놈은 싸우고, 한 놈은 뛰어다니고, 한 놈은 자기 갈 거라면서 어딘지도 모르는 길로 이탈하려고 하고, 한 놈은 그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눈치를 봤다. 그리고 그 중앙에 내가 서 있었다. 그날들의 경험이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이야.

호텔 로비에 가니 남색 체육복을 입은 두 남자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쌍둥이 아이였다.

"얘들아. 오늘 누나랑 같이 있을 거니까 누나 말 잘 들어야 해. 그럼 모다 씨. 잘 부탁해요."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로 갔다. 아이들은 등에 각각 배드민턴 채가 들린 가방을 들고 있었다.

"너네 배드민턴 좋아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배드민턴 되게 잘 쳐요."

"그럼. 배드민턴 치러갈래?"

아이들은 기뻤는지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실내 체육관 앞에서 아이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쥐여주었다.

"이거 받아. 오늘 너희가 누나 말 잘 들으면 여기에 이렇게 스티커를 붙여줄 거야. 스티커가 다섯 개 붙으면 내가 선물을 줄게. 알았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내 배드민턴장에 자리를 빌려 들어가자 애들이 뛰어가며 말했다.

"누나 우리랑 붙어요. 우리가 누나 이길 수 있어요."

"그래?"

"누나쯤은 금방 이겨요!"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그래"하면서 생각했다. '쪼꼬만 게 귀엽네. 근데 있지. 누나 배드민턴 동아리야. 작년엔 동아리장 제의도 받았단다. 음하하하.'

쓰다 보니 좀 악마스럽지만 나의 능력에 재패한 아이들은 나랑 치는 건 재미가 없어졌는지 자기네들 둘이서 칠 테니 심판을 하라고 했다.

원래 아이들이란 종족이 그런 건지. 이 애들이 유독 경쟁심이 센 건지. 자꾸만 이기려고만 들었다. 이기려고 자꾸만 규칙을 바꾸려고 들었다. 다행히도 배드민턴 규칙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철저히 지켰다.

"아니야. 여기 네트에 공 꽂혔잖아. 꽂히면 아웃이야. 1대 0."

"에이 아니에요. 이거는 아니죠."

"아니야. 여기 아슬아슬하긴 해도 선 넘었지? 넘으면 아웃이야. 1대 1."

"에이. 누나."

"아니야. 1대 2."

"아니야. 1대 3."

"... 대..."

"다음 라운드. 자리 바꿔."

처음에 이기려고만 한 이 두 아이도 정확한 룰로 승패를 말해주니 아까와는 달리 결과를 받아들이고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목격했다. 안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아이들은 어느새 누가 졌네 이겼네를 따지지 않고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그 뒤로 아이들은 즐겼다. 즐기고 있었다는 말 외에는 그 모습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규칙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애들도 마음 깊은 곳에선 알고 있었던 거다. 무엇이 편법이고 무엇이 정당한지를. 언젠가 거짓말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했을 때 얻지 못했을 때 안도감을 느꼈던 것처럼. 자신이 아무리 속이려 들어도 우리의 깊은 마음은 이미 무엇이 공정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다. 공정함과 정담함이란 마음의 방. 그 방은 너를 위한 방이 아닌 나를 위한 방이었다. 그리고 오래전 무너졌던 부당함 앞에서의 무력감도 그 속에선 자신에 대한 믿음과 뿌듯함으로 재탄생되었다. 내 마음에 그 공정함이란 방이 있는 한 내 마음은 언제나 그 속에서 오는 편안함을 느낄 거다. 그러니까 그 방은 네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방이었던 거다. 네가 얼마나 부정한 방식으로 무얼 얻었든 간에 이제 난 그 안에서 무력감 대심 부끄럼 없이 진실된 내 삶을 온 마음 다해 누릴 거다.

하도 쳐서 팔도 아플 텐데 더 치자고 조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음료수를 마셨다. 아이들은 음료수를 마시고는 체육관 벤치에 앉아 제 알아서 숙제를 했다. 아이들은 숙제를 하다 말고 "누나! 누나!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요?"하고 물었고, 내가 "몰라."라고 대답하면 숙제를 들이밀며 설명해주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에요. 어때요. 재밌죠?"라며 쫑알거리며 설명해주었다. 그 아이들이 쫑알거리는 소리와 높디높은 천장에 울리는 배드민턴 소리가 듣기 좋았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스티커 붙은 종이 줘봐."

나는 그 종이를 받고 전날 준비한 연필통과 노트를 선물해주었다. 작은 선물이었는데도 아이들 얼굴에는 행복이 번졌다. 아이들이 날 좋아해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하 호호하며 아이들을 호텔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달이 뜬 밤공기를 마시며 숙소로 갔다. 돌아가는 길에 괜히 깡충 뛰어보았다.

역시 스포츠맨십. 최고다. 최고.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길.

"이기는 데에만 집중해. 이기기 위해서라면 편법도 괜찮으니까 방법 신경 쓰지 말고 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살짝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됐거든요?"


아. 나는 스포츠맨십이 좋다.


쵝 ~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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