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미지는 개방적인 까닭에 폐쇄적이지 않다. ‘너’도 폐쇄형 음절은 아니지만 비개방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나는 계속해서 너를 향해 가고 있지만 어쩐지 너는 내게서 숨은 듯한..
따라서 ‘나’는 너’와 조응하지 않는다.
‘나’와 소통하는 단어는 ‘남’이다. ‘나’와 자음인 ‘ㅁ’을 더해 형성된 저 단어는 역사를 통해 오늘을 밝히듯, 타인에게서 나를 비추는 거울 같다.
‘입 구’와 유사한 자음 ‘ㅁ’ 하나가 나를 해부하는 지도처럼 펼쳐진 걸까. 우리는 사람과 사람 속을 헤매며 생을 태운다. 내가 그토록 미워한 누군가의 얼굴이 실상은 나와 다르지 않고, 사랑하는 자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주책맞게 울음이 터지는 이유는 내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신형철은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자음인 ‘ㅁ’이 ‘ㅇ’으로 닳는 기적이 사랑이라고 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가족이란... ‘너’와 ‘남’으로 지나쳤을지도 모를 ‘영원한 남’을 만나 매일 사랑의 기적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