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데는 잘 보이고, 먼데는 잘 안 보이고
안경에 대한 집착
요즘엔 가까운 곳을 보려면 안경을 벗는 것이 편하고, 멀리 보려면 안경을 써야 한다. 책을 보거나 글을 쓸 때에는 안경을 벗고, 운전을 하거나 컴퓨터 작업을 하려면 안경을 쓰는 편이 낫다. 자꾸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려니 얼마나 번거로운지. 좋은 점이라면, 안경을 벗으면 먼데 있는 것들이 적당히 흐리게 보여,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축적되는 지혜의 속도만큼, 챙겨야 할 것이 하나둘씩 늘어가는 걸 의미한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인경을 썼다. 안경이 잘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라, 사회적 자아가 등장할 땐 늘 렌즈를 꼈었다. 15년 동안 콘택트렌즈를 끼다가 각막이 약해져 어쩔 수 없이 안경을 쓰는 시간이 늘어났다. 오랜 시간 안경과 함께 했다. 지금까지 가장 마음에 드는 안경은 LA Eyeworks의 동그란 안경이었다. 얼룩무늬 안경테가 지루하면 빼서 은색 안경테로 바꿔 쓸 수 있었다. 아끼며 오래 썼는데 다리가 낡아 부러져 회생이 불가능해졌다.
그다음엔 올리버 피플스의 노란 투명 테 안경을 썼는데, 그 전 안경만큼 마음에 들진 않았다. 샤넬 로고가 크게 들어간 안경테를 쓴 적도 있었는데, 사감 선생님 같은 딱딱한 느낌이 나서 잠깐 쓰고 말았다. 그렇게 방황했다. 마음에 드는 안경테를 고르는 것은 마음에 드는 구두를 찾는 것보다 천 배는 더 어렵다. 매일 봐야 하는 거니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아예 브랜드와 가격표를 보지 않고 안경을 골라보기도 했다. MADE IN KOREA라고만 쓰여 있는 갈색 안경테. 디테일은 조금 아쉬웠지만, 가볍고, 내 동그란 얼굴에 잘 어울리는 원형 안경테였다. 가격도 5만 원. 가로수길 카페에서 손님들이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하셨던 걸 보면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 갈색 안경은 브랜드와 로고를 떼고도 예쁜 것을 찾으려면 '눈'과 '자신감'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가르쳐 줬다.
그 안경도 오래 썼는데, 안경과 선글라스를 늘 가지고 다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때 즈음 젠틀몬스터에서 안경 위에 선글라스 렌즈만 덮어쓸 수 있는 클립온 형태가 출시되었다. 안경테가 크고 두꺼워 안경 뒤로 숨을 수 있어 좋았다. 유일한 단점은 무겁다는 것. 그래도 아직까지 7년째 쓰고 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것은 안정감을 준다. 늘 같은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 주는 수호신 같은 느낌.
다초점 렌즈
6월 도쿄 여행에서 안경점에 들렀었다. '백산 안경점'이라는 곳에서 안경을 골랐는데, 역시 클립온이 있는 데다 일본 제품 특유의 디테일이 매우 충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다리 부분의 경첩도, 움직임의 속도도 매끈하다. 마음에 드는 안경인데, 아직도 착용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력 측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 때문에.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책장에 놓여 있다.
가까운 데는 안경을 벗는 게 편하고, 먼 곳은 안경을 쓰는 게 편한 지금 나의 눈 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때 안과에서는 다초점 렌즈를 권할 것 같은데, 이 참에 다초점 렌즈로 바꿔야 할지, 지금까지 썼던 것처럼 근시만 교정되는 렌즈로 바꿔야 할지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다초점 렌즈는 까만 머리카락 속에서 흰 머리카락을 처음 발견했던 날보다도 조금 더 기운이 빠진다.
김성령 씨가 보그 인터뷰에서 '지금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40대에는 운동을 1시간 하면 됐는데, 50대가 되니 운동을 3시간 해야 하더라'라고 말씀하신 걸 본 적이 있다. 시간이 아까워 한 톨이라도 살려 쓰려 종종걸음을 걷지만, 그만큼 눈과 손과 몸도 낡고 있다. 그래도 올해 꾸준히 요가를 해서 일상에서의 근육들은 좀 더 제 몫을 하고 있다. 내 팔과 다리의 움직임은 (스스로 느끼기에) 더 날렵해졌는데, 혹시 눈도 그런 방법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 본다.
어젠 가을을 맞아 커튼을 바꿨다. 커튼을 바꿔 달며 몸이 고생을 했다. 핀을 끼울 때는 안경을 벗고, 커튼 고리에 걸을 때는 안경이 있어야 잘 보였다. 안경을 벗고 쓰느라 도대체 의자 위에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른다. 내가 나한테 약이 올랐다. 한편으로는 이제 포기가 되었다. 잘 안 보이는 눈으로 의자에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관절이 부러질까 걱정이 되었다. 낮은 도수의 다초점이라 해도 그냥 그걸 골라야지. 이 안경이 지루해질 때쯤이면 나는 잘 웃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절한 할머니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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