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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Dec 19. 2018

겨울에 듣는 봄소리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가을날의 수채화

3년 전 가을 즈음, 친구가 오케스트라 연주회 초대권을 건넸다. 아홉 살 아들과 둘이 음악회라... 방해 될까 싶어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는데. '가보지 뭐. 도저히 안 되겠으면 중간에 나와야지.'라 생각했다. 2015년 9월의 마지막 날 예술의 전당은 수채화였다. 가만히 서서, 아다지오로 한 바퀴 천천히 돌며 파노라마를 눈에 담았다. 산 향기를 품고 불어오는 바람, 도란도란 들리는 말소리, 분홍 파랑 흰색의 빛이 번지는 분수.


맨 앞열 자리다. '코리아 쿱 오케스트라'라고. 협동조합이라니...? 신선했다. 음악은 잘 몰라도 연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강렬했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프로 아티스트가 언제나 높은 수준의 연주를 한다면, 신인에게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패기가 있다. 이 날은 후자에 가깝게 느껴졌는데, 무작정 신이 났다. 원래 오케스트라 연주가 이렇게 신명 나는 거였나?


그때, 바이올리니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키에, 긴 머리를 늘어 뜨린 채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꼭 동화 속 공주님 같았다. 눈은 별처럼 빛났고, 환하게 웃는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이런 분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어떤 느낌일까? 부드럽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감미로운 선율을 상상했는데, 반전. 그녀의 바이올린 소리는 거침없이 뻗어간다. 막힌 감성을 뚫으려는 듯이. 바이올린과 활이 연주자의 몸에 붙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팅거벨이 드럼을 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바이올린 연주에 풍당 빠졌다. 팜플렛을 꺼내 보니, 심지어 이름도 인상적이다. '김 봄소리'. 여운이 남아 예술의 전당을 걸었다. 마침 분수쇼에서도 같은 음악이 흐른다. 한참을 앉아 구경하던 아들이 "엄마, 나는 이 부분이 참 좋아. 불새 같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거 같아." 한다. 나도 그 부분이 좋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김 봄소리와 양반 다리 하고 분수쇼를 감상하던 아홉 살 아들이 떠오른다.


분수쇼

요즘 김 봄소리의 바이올린 연주가 자꾸 생각이 났다. 그 사이, 아들은 열두 살이 되었고, 그녀는 4년 장학생으로 줄리어드를 마쳤다. 떠오르는 아티스트의 팬이 되면 함께 성장하는 기쁨이 있다. 이번엔 표를 구입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차이콥스키 협주곡은 제주도의 유채꽃처럼 끝도 없이 펼쳐졌다. 활을 켜는 팔은 더욱 단단해졌고, 오라는 더 환하게 빛났다. 한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반복재생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아들은 마지못해 들어주는 눈치였다. 나는 함께 듣고 공감하고 싶은데. 욕심이었나. 그래도 집에 와서는 계속 콧노래를 부른다. 내심 미소가 배어 나왔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느낀 경험이 큰 바탕이 되는 거라 믿는다.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방울방울 스며들며 취향이 된다. 이제 몽글거리기 시작하는 아들의 취향을 존중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똑같은 운동화를 보고 예쁘다고 할 때 기분이 아주 좋다.   


우린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의 음악도 좋아한다. 아들이 "엄마,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노래가 참 좋아. 찾아봐 줘." 했을 때 진혼곡이 슬프고도 아름다워 계속 들었다. '마녀 키키',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그랬다. 그 음악들의 작곡가 히사이시 조는 나는 매일 감동을 만나고 싶다에서 '창조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보고, 얼마나 많이 듣고,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 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축적의 절대량을 늘리면 그 사람의 수용 능력이 넓어질 거라고.


나중에 아들이 직접 쓴 카드와 꽃다발을 건네며 공연이나 전시를 곁들이는 남자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기왕이면 계속 모아두고 싶을만큼 예쁜 카드와 꽃다발을 고르면 좋겠다. 귀한 걸 알아 보는 눈, 마음을 채우는 소리를 듣는 귀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느끼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부디 삶을 반들반들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어른이 되길. 그런 의미에서 김 봄소리의 공연을 또 예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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