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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an 15. 2019

목욕탕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겨울날의 목욕탕

'사우나'라는 세련된 이름도 있지만, 나는 '목욕탕'이라는 투박한 이름에서 친근함을 느낀다. 겨울이 되면 일주일 내내 목욕탕에 가는 주말을 기다린다. 가족들이 늦잠을 자고 있는 틈을 타 오렌지 색 목욕 가방을 들고 살금살금 빠져나온다. 때 비누, 이태리타월, 속옷, 등밀이 다 잘 챙겼나 다시 점검한다. 꼭 필요한 엑기스만 남은 목욕가방. 완벽한 목욕 시간을 위해서는 빠진 것 없이 챙겨야 한다.


건물 9층에 자리 잡은 목욕탕은 적당히 신식이고, 적당히 옛스럽다. 2019년 기준으로 1인당 목욕비는 8천 원이다. 키를 받아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라커룸으로 간다. 이 곳은 열쇠를 꽂아 돌려 여는 방식인데, 문짝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탈의실 입구를 지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삼십몇 년 전으로 도착한 느낌이 든다. 작은 매점의 삶은 달걀과 단지 우유, 진한 핑크색에 노란 꽃무늬 그림이 그려진 홈드레스가 있는 가판대는 기억 속 그곳과 아주 닮았다.


엄마와 목욕탕에 가는 날은 그 자리에서 땅으로 푹 꺼지고 싶을 만큼 싫었다. 양말도 새하얗게 삶아 신기던 엄마의 깔끔한 성격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피가 날 때까지 때를 밀었다. 넷을. 동생들은 살살 밀어주면서 왜 나만 피가 날 때까지 밀었나. 나만 미워하나 싶어 서러웠다. 엉엉 울면 탕이 울려 시끄러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흔의 엄마는 서른둘셋의 엄마를 기억도 못 할 테지만. 넷을 씻기고 나서 엄마는 직접 당신 몸을 닦았다.  


나도 엄마처럼 내 몸은 내가 닦는다. 탕에 몸을 담그면 맞은편에 세신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있다. 세신사 이모님께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온몸을 회 바르듯이 구석구석 때수건으로 민 후, 침대에 올라 발로 살살 밟아 지압을 해 주신다. 침대가 높아 위험하니 천정에 있는 봉을 잡고 서서 어깨, 팔, 골반을 밟아 주신다.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조마조마하지만, 세신사 이모님의 다리는 내 다리보다도 근육이 단단하다.

사진은 에르제 땡땡전. 글의 내용과 크게 상관없습니다.
창조성이 솟아나는 열탕과 냉탕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가 옆에 있는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근다. 처음에는 발만 겨우 담글 수 있었는데, 이젠 하반신을 지나, 대담하게 명치까지 담그고 앉아 있다. 일분이나 이분 정도도 괜찮다. 조금 더 건강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몸이 차갑게 식으면 다시 열탕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세 번쯤 반복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옮겨 다닌다. 다행히 오늘은 열탕에도 냉탕에도 사람이 거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날것으로 서 있는 그곳에선 몸가짐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걸음걸이, 물을 아끼는지, 옆사람을 배려하며 몸을 닦는지 다 보인다. 몸에 물을 끼얹는 바가지 각도에서 인품이 보인다 하면 과장일까. 벗은 몸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흘러간다. 아가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몸이 있는 그곳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호모 사피엔스까지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딸과 함께 목욕탕에 온 엄마들이 부럽다. 몸이 비슷하게 자란 딸과 조잘조잘 대화하는 게 들리면 샘이 날 지경이다. 아들과는 다섯 살 때쯤 커뮤니티 단지에 있는 사우나에 갔던 게 마지막이다. "엄마, 내가 등 밀어줄까?" 하며 비누칠한 이태리 타올로 등을 닦아 주었다. 제법 쓸만했었는데...... 아들이 7세 넘은 다음에는 나 홀로 목욕탕에 간다. 이제 아들과 공중목욕탕에 같이 갈 일은 평생 없겠지. 마음이 외롭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탕에 들어가면 글감이 거품처럼 솟아 표면에 떠다닌다. 이걸 어떻게 건져낼까. 이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기록하면 다 잡을 수 있을까. 몸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는 순간 글감이 거품같이 꺼질까 봐 조심스럽다. 오늘은 탈의실에서 스마트폰에 겨우 미미의 집, 목욕탕, 당근 마켓을 겨우 건져냈는데. 아까워 죽겠다. 목욕하다 말고 뛰쳐나갔다는 아르키메데스가 이해된다.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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