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겨울날의 목욕탕
'사우나'라는 세련된 이름도 있지만, 나는 '목욕탕'이라는 투박한 이름에서 친근함을 느낀다. 겨울이 되면 일주일 내내 목욕탕에 가는 주말을 기다린다. 가족들이 늦잠을 자고 있는 틈을 타 오렌지 색 목욕 가방을 들고 살금살금 빠져나온다. 때 비누, 이태리타월, 속옷, 등밀이 다 잘 챙겼나 다시 점검한다. 꼭 필요한 엑기스만 남은 목욕가방. 완벽한 목욕 시간을 위해서는 빠진 것 없이 챙겨야 한다.
건물 9층에 자리 잡은 목욕탕은 적당히 신식이고, 적당히 옛스럽다. 2019년 기준으로 1인당 목욕비는 8천 원이다. 키를 받아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라커룸으로 간다. 이 곳은 열쇠를 꽂아 돌려 여는 방식인데, 문짝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탈의실 입구를 지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삼십몇 년 전으로 도착한 느낌이 든다. 작은 매점의 삶은 달걀과 단지 우유, 진한 핑크색에 노란 꽃무늬 그림이 그려진 홈드레스가 있는 가판대는 기억 속 그곳과 아주 닮았다.
엄마와 목욕탕에 가는 날은 그 자리에서 땅으로 푹 꺼지고 싶을 만큼 싫었다. 양말도 새하얗게 삶아 신기던 엄마의 깔끔한 성격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피가 날 때까지 때를 밀었다. 넷을. 동생들은 살살 밀어주면서 왜 나만 피가 날 때까지 밀었나. 나만 미워하나 싶어 서러웠다. 엉엉 울면 탕이 울려 시끄러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흔의 엄마는 서른둘셋의 엄마를 기억도 못 할 테지만. 넷을 씻기고 나서 엄마는 직접 당신 몸을 닦았다.
나도 엄마처럼 내 몸은 내가 닦는다. 탕에 몸을 담그면 맞은편에 세신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있다. 세신사 이모님께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온몸을 회 바르듯이 구석구석 때수건으로 민 후, 침대에 올라 발로 살살 밟아 지압을 해 주신다. 침대가 높아 위험하니 천정에 있는 봉을 잡고 서서 어깨, 팔, 골반을 밟아 주신다.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조마조마하지만, 세신사 이모님의 다리는 내 다리보다도 근육이 단단하다.
창조성이 솟아나는 열탕과 냉탕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가 옆에 있는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근다. 처음에는 발만 겨우 담글 수 있었는데, 이젠 하반신을 지나, 대담하게 명치까지 담그고 앉아 있다. 일분이나 이분 정도도 괜찮다. 조금 더 건강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몸이 차갑게 식으면 다시 열탕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세 번쯤 반복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옮겨 다닌다. 다행히 오늘은 열탕에도 냉탕에도 사람이 거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날것으로 서 있는 그곳에선 몸가짐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걸음걸이, 물을 아끼는지, 옆사람을 배려하며 몸을 닦는지 다 보인다. 몸에 물을 끼얹는 바가지 각도에서 인품이 보인다 하면 과장일까. 벗은 몸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흘러간다. 아가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몸이 있는 그곳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호모 사피엔스까지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딸과 함께 목욕탕에 온 엄마들이 부럽다. 몸이 비슷하게 자란 딸과 조잘조잘 대화하는 게 들리면 샘이 날 지경이다. 아들과는 다섯 살 때쯤 커뮤니티 단지에 있는 사우나에 갔던 게 마지막이다. "엄마, 내가 등 밀어줄까?" 하며 비누칠한 이태리 타올로 등을 닦아 주었다. 제법 쓸만했었는데...... 아들이 7세 넘은 다음에는 나 홀로 목욕탕에 간다. 이제 아들과 공중목욕탕에 같이 갈 일은 평생 없겠지. 마음이 외롭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탕에 들어가면 글감이 거품처럼 솟아 표면에 떠다닌다. 이걸 어떻게 건져낼까. 이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기록하면 다 잡을 수 있을까. 몸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는 순간 글감이 거품같이 꺼질까 봐 조심스럽다. 오늘은 탈의실에서 스마트폰에 겨우 미미의 집, 목욕탕, 당근 마켓을 겨우 건져냈는데. 아까워 죽겠다. 목욕하다 말고 뛰쳐나갔다는 아르키메데스가 이해된다.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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