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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an 09. 2019

롱 패딩

정성껏 고르고 아껴 쓰는 반들반들한 삶

아들이 열세 살이 되었다. 아들에게 열세 살은 한 번이고 열세 살의 엄마도 한 번이다. 사춘기는 폭풍 성장기라고 했다. 아들도 자고 일어나면 크고 자고 일어나면 큰다. 작년에 사준 겨울 점퍼가 꼭 맞는가 싶더니 곧 작아진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점점 자라는 키도, 조금씩 무거워지는 목소리도 낯설다. 이렇게 한 뼘씩 서로에게서 독립하는 거구나.


아들은 외모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한 달 내내 냄새가 날 정도로 똑같은 점퍼만 입고 다녔다. 다리가 길어져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길이가 추워 보인다. 좀 긴 옷을 사줘야 하나.

“너도 롱 패딩 사줄까?
"아니. 이거 입을만한데 엄마. 돈아까우니까 올해는 그냥 이걸로 겨울을 나고 내년에 새로 사자."
"그럴까?"
애아빠가 은근슬쩍 물어보니 하나 있어도 좋다 했단다. 헛갈린다.


그럼 사러 가지 뭐. 마침 세일 기간이라 재촉했다.
"귀찮은데 꼭 지금 가야 하나? 머리도 아픈데 다음에 가자."
"지금 가자. 요즘 너무 추우니까 얼른 사서 입고 다니자."

"아, 귀찮은데....."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백화점에 가서 한 바퀴 돌아보자마자 귀찮음에 젖은 솜 덩어리는 사라지고 발에 날개를 단 것 같은 날렵한 청소년이 나타났다.
"엄마, 여기 가보자. 이거 어때?"
"입어 봐."
처음 간 브랜드에서 밝은 회색과 남색 패딩을 입었는데 한참 고민을 한다.
"더 보고 와도 돼. 준서야."
"그럴까."
"그럼 더 보고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뭔가 죄송하다면서 곤란해한다. 그렇지만, 어깨선이 커서 썩 마음이 들지 않는단다. 어른들께는 일터니까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면 된다고 말해줬다.

두 번째 들른 곳에서는 남색과 흰색을 입어봤다. 흰색 점퍼를 입은 아들은 내 눈에는 아이돌 가수 같았다. 아들도 마음에 든단다. 나는 기꺼이 세탁을 자주 할 수고를 각오하고 흰색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안타깝게도 사이즈가 없었다. 벌써 4개나 입어봤다. 보들보들한 털이 있는 걸 또 입어본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하라고 한 걸음 물러나 아들을 관찰한다.

모자를 썼다 벗었다 어깨선을 보고 팔을 들어 돌려본다. 거울 앞에서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 하며 옷을 벗어 놓고 나온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보고 올게요."
"이거 이쁜데 아주 잘 어울려."
"음... 그래도 조금 더 보고 올게요."
"그럼 이거 정리 안 하고, 기다릴께." 농을 거신다.

"네, 조금 더 보고 오겠습니다." 대답하고 돌아서는 아들. 표정이 난감하다. 다섯 개째.

"아직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어."
"그럼 엄마가 좋아하는 브랜드에 가 보자."
"어? 이 나무 표시? 이게 이 브랜드구나! 반 친구들이 두 명이나 이 옷을 입고 와서 궁금했는데. 이거구나."
뭐야, 이 녀석. 관심 없는 척하더니 다 보고 있었어. 파란색을 입어봤는데 사이즈가 너무 꼭 맞아 어른용 사이즈에서 다시 골랐다. 검은색 롱 패딩을 입고, 똑같이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하며 크기를 점검하고, 어깨선을 꼼꼼히 살핀다.
"엄마, 나 이걸로 할래."
"그게 마음에 들어?"
일곱 개 째. 드디어 결정했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따라다니기만 했다. 내년에 입을 것까지 생각해서 고르는 걸 보니, 다음에는 스스로 고르라 하고 나중에 계산만 해도 되겠다.
"준서야, 나중에 여자 친구가 생기면 쇼핑할 때 이렇게 해. 따라다니면서 봐 주고 골라주고."
"여자 친구가 아니라 아내겠지."
"여자 친구가 있어야 아내가 있는 거 아니야?"
"그건 그러네."
"쇼핑한 거 들어주기도 하고. 무거우니까."
"응, 알았어."


쇼핑하는 걸 보니 은근히 깐깐한 구석이 있다. 아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아들, 너 7개나 입어 보는 거 내가 다 봤다. 그래도 아래위 수박색 옷을 입고 애벌레가 된 열두 살의 아들보다 보는 눈이 있는 열세 살 아들이 좋다. 응? 이 녀석 새 패딩은 옷걸이에 걸어 놓는다.
"? 이 옷은 아무 데나 던져놓지 않고 걸어두네?"
"한 열 번 입으면 똑같을 거야, 엄마."
아닐 거야, 아들. 꼭 마음에 드는 걸 만나면 애지중지하게 된단다. 하나를 사더라도 정성껏 고르고, 아껴가며 오래오래 쓰도록 해라, 아들. 나는 네가, 직접 고르고 정든 따뜻한 사물들에 둘러 싸여 살면 참 좋겠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것들에 둘러 싸여 사는 삶. 그게 행복한 삶이고,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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