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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Mar 13. 2019

구질구질한 속마음

사랑은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입시

  고등학교 때 일이다. 공부가 하도 지루해 뭐라도 해야 했다. 참고서를 알록달록하게 칠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한 번 죽 읽어가면서 잘 모르겠는 건 파란 볼펜, 두 번째 읽어도 모르겠는 건 파란 줄 아래 빨간 줄, 세 번째 읽어도 모르겠는 건 빨간 별표, 그래도 모르는 건 노란 형광펜으로 칠했다. 시험 전날엔 노란 형광펜만 보는 거다. 혹시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빨간 별표도 본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빨간 줄, 파란 줄도 봤다. 전 과목을 그런 식으로 공부했다.

  내 친구는 내가 쓰는 문제집을 사고, 내가 쓰는 펜을 똑같이 쓰고, 내 공부 방법을 따라 해 성적이 쭉쭉 올랐다. 내 문제집과 헛갈릴 만큼 똑같이 공부하는 그 친구를 보며, 내 방법이 족집게 처방전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인 것 같이 여겨져 고맙기도 했다. 내심 동시 합격하는 성공 신화를 기대했는데, 나는 한 번에 동아줄을 잡았고, 친구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친한 친구지만, 당락이 결정되고 나서는 연락하기도 모 했다.

  수능으로 바뀐 첫 번째 해, 모교에서 고3 후배들을 격려하는 행사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선배 자격으로, 일 년 만에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내 친구도 학교에 왔다. 일 년 만에 우리 둘이, 우연히,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올해는 꼭 합격하길 바라. 최선을 다 해야 해!” 했다. 그리고, 내겐 별다른 기억이 없다.

  친구는 그 해 대학에 들어갔고, 합격했노라 내게 승전보를 보냈다. 그 엽서를 들고,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1994년. 그 시절엔 빠르고, 정확하고, 편리한 스마트폰 대신, 느리지만, 기억하고, 챙기는 낭만이 있었다.

사랑은 속마음을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속마음

  나는 그렇게 풋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옛날 일에 대해, 친구가 자그마치 20년도 지나 내게 풀어놓았다. 그 날,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대학생이고, 화장을 하고, 짧은 스커트에 뾰족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오더라고. 그러면서 “최선을 다 하길 바라.”라고 이야기했다고. 아마도, 재수생이었던 친구 눈에 내 모습이 얄미웠겠지 추측해 본다.

  나는 별 다른 기억이 없는 일이었는데...... 아마 조심스럽게 말을 했을 텐데, 입장이 그랬을 수 있겠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어머, 정말 그랬어? 아우야, 정말 미안하다. 니 속마음을 말해줘 고마워.” 했어야 했는데, 나는 변명을 먼저 했다. “어머나. 그렇지만, 진심이었을 거야.”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잘 못 말했다는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내 마음은 아직도 멀었구나...... 한계를 느꼈으면 외면하지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더 노력하면 된다. 나는 미루지 않고 친구에게 바로 카톡을 했다.

  속마음은 내 감정이다. 그 감정을 말하는 건, 쿨하지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구질구질한 쪽에 가깝다. 그래서 외면하게 되지만, 나에게조차 외면당한 내 마음은 말라 붙는다. 메마른 땅에서 사랑이 솟아나긴 힘들다. 그러니까 구질구질해도, 말하고 표현하는 편이 낫다.


  내가 인정하는 내 마음은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며, 사랑을 피운다. 속마음을 말하는 건 원래, 엄청, 힘든 일이다. 내 친구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20년 넘게 걸렸지만, 나는 엄마 아빠께 사랑한다고 속마음을 말하는 데 45년이나 걸렸다. 그래도 말하는 게 낫다. 사랑은,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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