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입시
고등학교 때 일이다. 공부가 하도 지루해 뭐라도 해야 했다. 참고서를 알록달록하게 칠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한 번 죽 읽어가면서 잘 모르겠는 건 파란 볼펜, 두 번째 읽어도 모르겠는 건 파란 줄 아래 빨간 줄, 세 번째 읽어도 모르겠는 건 빨간 별표, 그래도 모르는 건 노란 형광펜으로 칠했다. 시험 전날엔 노란 형광펜만 보는 거다. 혹시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빨간 별표도 본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빨간 줄, 파란 줄도 봤다. 전 과목을 그런 식으로 공부했다.
내 친구는 내가 쓰는 문제집을 사고, 내가 쓰는 펜을 똑같이 쓰고, 내 공부 방법을 따라 해 성적이 쭉쭉 올랐다. 내 문제집과 헛갈릴 만큼 똑같이 공부하는 그 친구를 보며, 내 방법이 족집게 처방전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인 것 같이 여겨져 고맙기도 했다. 내심 동시 합격하는 성공 신화를 기대했는데, 나는 한 번에 동아줄을 잡았고, 친구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친한 친구지만, 당락이 결정되고 나서는 연락하기도 모 했다.
수능으로 바뀐 첫 번째 해, 모교에서 고3 후배들을 격려하는 행사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선배 자격으로, 일 년 만에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내 친구도 학교에 왔다. 일 년 만에 우리 둘이, 우연히,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올해는 꼭 합격하길 바라. 최선을 다 해야 해!” 했다. 그리고, 내겐 별다른 기억이 없다.
친구는 그 해 대학에 들어갔고, 합격했노라 내게 승전보를 보냈다. 그 엽서를 들고,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1994년. 그 시절엔 빠르고, 정확하고, 편리한 스마트폰 대신, 느리지만, 기억하고, 챙기는 낭만이 있었다.
속마음
나는 그렇게 풋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옛날 일에 대해, 친구가 자그마치 20년도 지나 내게 풀어놓았다. 그 날,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대학생이고, 화장을 하고, 짧은 스커트에 뾰족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오더라고. 그러면서 “최선을 다 하길 바라.”라고 이야기했다고. 아마도, 재수생이었던 친구 눈에 내 모습이 얄미웠겠지 추측해 본다.
나는 별 다른 기억이 없는 일이었는데...... 아마 조심스럽게 말을 했을 텐데, 입장이 그랬을 수 있겠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어머, 정말 그랬어? 아우야, 정말 미안하다. 니 속마음을 말해줘 고마워.” 했어야 했는데, 나는 변명을 먼저 했다. “어머나. 그렇지만, 진심이었을 거야.”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잘 못 말했다는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내 마음은 아직도 멀었구나...... 한계를 느꼈으면 외면하지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더 노력하면 된다. 나는 미루지 않고 친구에게 바로 카톡을 했다.
속마음은 내 감정이다. 그 감정을 말하는 건, 쿨하지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구질구질한 쪽에 가깝다. 그래서 외면하게 되지만, 나에게조차 외면당한 내 마음은 말라 붙는다. 메마른 땅에서 사랑이 솟아나긴 힘들다. 그러니까 구질구질해도, 말하고 표현하는 편이 낫다.
내가 인정하는 내 마음은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며, 사랑을 피운다. 속마음을 말하는 건 원래, 엄청, 힘든 일이다. 내 친구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20년 넘게 걸렸지만, 나는 엄마 아빠께 사랑한다고 속마음을 말하는 데 45년이나 걸렸다. 그래도 말하는 게 낫다. 사랑은,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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