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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Mar 20. 2019

칼로 물 베는 조언

너와 나는 다른 사람


20세기의 메신저


PC통신 천리안, 하이텔 시절을 지나, 인터넷의 세계로 옮겨 오자 사람들은 아이씨큐라는 메신저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회색 채팅창에 귀여운 꽃 모양 이모티콘을 가졌었는데. 그리고, MSN 메신저로 넘어갔고, 싸이월드와 연동되며, 무료 문자를 제공하는 네이트온으로 갔다가 지금은 카카오톡을 쓴다. 내 개인의 경험이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한다.

인터넷을 통한 메신저의 시대가 열리자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해오기 시작했다. 요즘 메신저는 빠르고 정확한 정보 전달이 주목적이라면, 그 시절엔 손편지로 적던 감성이 메신저의 옷을 입은 거였다. 서로의 ‘이야기’를 전했다. 아날로그에 디지털이 입혀진 그 시대는 20세기 낭만이 노을처럼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옛날 옛날 고릿적, 아이씨큐를 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신혼인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어제 아내와 싸워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왜 싸웠냐 물었더니 아내가 열쇠를 가지고 외출해서 문밖에서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는 이야기이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어쩌다 실수한 걸,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벌써 몇 번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아내에게 삶의 태도가 느슨하다면서, 얼마나 정신이 없으면 매번 열쇠를 갖고 나가 문밖에서 기다리게 하느냐고 몰아세운 모양이다. 아내가 눈물을 뚝뚝 쏟았다고. 화가 나면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신혼인데 울음을 쏟을 정도로 독하게 말을 하다니... 너무 했다 싶었다. 그래도, 내 친구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과 결혼한 것 같아 다행이다.  

어떻게 하면 아내가 열쇠를 잊어버리지 않고 외출하도록 할 수 있느냐는 상담이었다. 뭐야, 이 녀석.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맏딸 콤플렉스가 발현되며 또 정답을 찾아 준다. 먼저 나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굳이 열쇠가 하나인 그 방법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또 물었다. 다행히 그건 아니라고 한다. 그럼 아예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안 되는 걸 바꾸려 하지 말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라는 거였다. 아내에게 자극을 주어 습관을 바꾸겠다 해도 마음에 상처만 남을 뿐. 여성은 마음으로도 기억하기 때문에 독한 말은 삼가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했었다. 열쇠를 복사해 한 개 더 만들거나, 혹은 디지털 도어록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대안을 마련해 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적절한 조언을 해 준 걸까.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난 김에 그 얘기를 꺼냈더니, 친구는 그때 그 일을 전혀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 착한 아내와 20년이 지난 지금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내 조언이 효과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한편으로는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면 그렇게 강력한 효과가 있지도 않았나 보다.

부부는 다른 존재이면서, 같은 공간에서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동일시된다. 기대 수준이 ‘나만큼’, ‘나처럼’이 되는데, 그걸 분리하는 일에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당신과 나는 다른 개체니까, 서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내 자유에 영향을 미치는 건 싫은 복잡한 마음. 어차피, 칼로 물 베는 조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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