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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Dec 11. 2019

엄마의 살림살이

이사


  어쩌다 보니, 결혼 후 18년 동안 이사를 열일곱 번을 했다. 세상에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 모든 경험은 근육에 고스란히 쌓여 직관이 된다. 덕분에 어떤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스캔하게 된다. 둘러 봄과 동시에, 공간 데이터가 입력된다. 나의 뇌세포들은 벌써 가구와 주방, 동선들을 레고 블록 갖고 놀듯 뒤집었다 돌렸다, 얼굴끼리 마주 보게 했다가 돌려 등을 대고 앉힌다. 더불어 내 머릿속  CPU가 뜨거워진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짐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세 식구 사는 데 뭐가 이렇게 많나. 짐이 헐거워 이사가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공간에도 군살이 낀다. 잠깐 방심하면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잡동사니가 서랍장마다 꽉 차 있고.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원하는 나사못을 찾기 힘들어 또 사고, 또 사고해서 정리가 불가능하다. 환경에 미안하니 버리지도 못 하고 쓰지도 못하고...... 사실 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열어보지 않은 서랍이라면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정리해도 괜찮다.

  집에도 살이 찌는 것을 느낀다. 2년 즈음이 되면 나는 못 견디게 갑갑해서, 이사를 통해 군살을 뺐다. 이사는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다. 힘드니, 몸의 군살도 함께 빠진다. 그러면서 몸도, 삶도 가벼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쇼핑을 즐기지도 않는데, 도대체 살림살이는 왜 그렇게 늘어나는 걸까. 비워도 비워도 채워지는 살림살이는 죽어도 죽어도 사는 좀비가 아닐까.

  이번 봄부터 냉동실에 얼음 폭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냉동실이 꽉 차 도대체 비울 수가 없어 날씨가 추워지기만 기다렸다. 우리 집 냉장고는 냉동실만 전원을 내릴 수 없어, 냉장고 전체의 전원을 꺼야 한다. 냉동실 속에서 잠자고 있는 먹거리들은 없어도 괜찮은 것들이라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고 버렸다. 10리터 쓰레기봉투로 4개. 속이 다 후련했다. 텅 빈 냉동실은 새로운 도화지같이 자유로웠다.


엄마의 짐


  엄마가 31년 만의 이사를 준비하고 계신다. 혼자 정리하시긴 힘들지 싶어 동생들과 지원군으로 나섰다. 남편과 아이 없이, 우리들이 살던 집에 가 본 것이다.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세 자매가 함께 갔던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와 국물에 버무린 못난이 만두, 김밥을 샀다. 떡볶이를 먹으면 식혜를 한 그릇 떠 주시는 서비스도 여전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느낌. 우린 어른이 되었는데, 그곳은 거의 안 변했다.
 
  나는 우리 집 정리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로 엄마의 짐 정리에 나섰다. 그래도 반나절쯤 치우면 공간이 휙 비겠지 싶었다. 게다가 천군만마와 같은 동생들이 있는데! 각자 한 공간 씩 맡아 정리하는데, 셋째의 손이 유난히 빠르다. 셋째는 묻지도 않는다. 손만 움직이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공중에 떠다니며 단호하게 몽땅 다 버린다. 서랍을 들어 거꾸로 털어 버리고, 상자도 통째로 쏟아붓는다. 솜씨가 남다르다.

“어, 너, 완전히 전문가의 손길인데? 혹시 어디서 알바라도 한 거야?”
“...... 얼마 전에 시댁, 이사하셨잖아.”  
“아, 맞다. 그랬지.”
“너무너무 많아. 언니, 그렇게 해서는 정리가 안 돼. 저리 비켜.”

엄마의 잡동사니 서랍에서 찾아낸, 내 고등학교 시절의 갈색 로트링 샤프도 동생 손길의 쓰나미 앞에서 무참히 사라졌다.

  엄마는 아까워 버리지 못하시고, 쟁이고 쟁이고 또 쟁여 쌓아 두신다. 엄마의 장롱 속에서는 수건이 50장 넘게  나왔다. 두 식구 살면서 수건이 50장이나 필요할 일인가. 사용하지 않는 새 수건이 20장이 넘는다. 그뿐이 아니다. 두 식구 살림살이에 양문형 냉장고, 김치냉장고 두 대, 베란다에 가득한 말린 나물과 과일청, 각종 즙류에 곡식들...... 이게 정상 범위인가.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의 시부모님께서도 최근 이사를 하신 덕분에 1940~50년 대에 태어나신 70대 어르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살아보지 못 한 세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었던 시대. 경험은 근육에 배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이 역사고 문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의 살림살이가 짠하다. 이제, 우리나라는 국민 소득 3만 불 규모의 선진국인데...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지내시도록 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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