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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Feb 05. 2020

조카의 반들반들한 인형들



설날, 놀이

설날, 열네 명의 가족이 모였다. 조카들이 모여 다리 찢기 놀이를 하고 있길래, 나도 끼어들어, “나도, 나도. 나도 할 수 있어.” 하며 그동안 갈고닦은 다리 찢기 실력을 뽐냈다. 매일매일 요가를 통해 부드러워진 고관절은, 내측 각도 90도 정도이던 다리와 다리 사이의 각도를 140~150도 사이의 둔각으로 만들었다. 에헴. 조카들은 은 “오~”하며 알아준다.

조카들 무리는 이제 자세를 바꿔, 앉은 자세로 무릎을 바깥쪽으로 꺾어 앉는 영웅 자세를 한다. 나는 그것도 할 수 있다. 오른쪽 무릎을 접어 오른쪽 허벅지 옆으로, 왼쪽 무릎을 접어 왼쪽 허벅지 옆으로 붙이고 천천히 뒤로 눕는다. 매일 요가를 한 지 2년이 되었다. 유튜브를 보고 집에서 따라 하는 요가지만, 그래도 나의 미토콘드리아들은 미세하게 개체수가 늘어 조금씩 조금씩 근육이 유연해진다.

하지만 원체 뻣뻣한 내 근육은 티끌만큼씩 자라니, 아직 완성된 자세는 아니다. 등이 바닥에 닿자, 무릎이 바닥에서 뜬다. 이때를 놓칠 세라, 장난기가 발동한 조카들이 손으로 무릎을 세게 누른다. 아직 뻣뻣한 내 허리가 자동으로 딸려 올라온다. “악, 그건 아직 안 돼! 수련이 더 필요해!”하며 벌떡 일어서는 나를 보고 가족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아우야 아, 나 사십칠이야.”
“네, 이모? 사십칠이 모예요? 사십칠 키로?”
“아니 이, 사십칠 세.”
“아~ 와하하하하하”

나를 골려 먹은 이 녀석의 흉을 좀 보자.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큰 조카는 일곱 살 때 매일 우는 어린이였다. 밥 먹기 싫어서 울고, 피아노 치기 싫어서 울고, 혼자 자기 싫어서 울고. 툭하면 울었다. 왜 그럴까. 다른 건 몰라도 혼자 자면 잠도 푹 자고 좋을 텐데 싶어, 물었다.

“왜, 혼자 자기 싫어?”
”무서워요.”
”어떤 게 무서워?”
”그냥 무서워요.”
“그런데 혼자 자면 아주 편하고 잠이 잘 오기도 하는데. 한 번 해 볼래?”
“아니요. 무서워서 싫어요.”
어떻게 하면 안 무서울까...?

크리스마스를 맞아 조카들 선물을 준비하러 창신동 완구거리 탐색에 나섰던 나는, 가게에서 캐릭터 인형 4개를 발견하고 이거다 싶었다. 핑크색, 보라색, 노란색, 파란색의 옷을 입은 긴 머리 인형들은 캐릭터 변신 후 요정들 같았다. 나는 이 인형들을 포장해, 조카 눈을 바라보며, “희서야, 얘네들이 너를 지켜줄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조카는 내가 일곱 살 때 선물한 그 캐릭터 인형 4개를, 5학년 영어 캠프 갈 때도 가방에 챙기고, 6학년 수학여행 갈 때도 챙겼다. 얼마 전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조카의 방에서 이 인형 4개를 만났다. 한눈에 알아봤다. 그동안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져 있는 인형들. 가만있자. 일곱 살 때니까 거의 10년이 다 되었네. 조카는 인형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말이 기억에 남았던 걸까.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때마다 인형들이 디딤돌이 되어 주었을까. 언제까지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일 줄로만 알았던 조카들과 아들이 점점 자라고 있다. 다음 세대의 스스럼없는 수평적 태도가 내게도 용기를 주곤 한다. 덕분에 나란히 앉아 다리 찢기를 하고, 영웅자세를 하며 용을 쓴다. 덕분에 함께 깔깔 대고 웃고, 몸도 마음도 개운해진다.



+ 유튜브 http://bit.ly/작가정재경의초록빛창작생활

+ 인테리어디자이너 정재경의 모던마더 스튜디오 http://modernmother.kr

+ 제품디자이너 정재경의 더리빙팩토리 http://thelivingfac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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