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경 Mar 11. 2020

파리 식물원에서 느낀 똘레랑스

  너도 우리 집에 종종 들러서 알잖아. 식물이 좀 많은 거. 시작은 단순했어. 너도 알다시피,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식물이 많으면 미세먼지가 좀 덜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 개 두 개 그러다가 200개 정도 되었어. 그런데 식물은 정말로 실내 초미세먼지를 정화해 주기도 하고, 습도도 조절해 줘. 일 년 내내 초미세먼지 측정기를 온도계처럼 보며 지내는데, 진짜로 그래.  


  처음엔 공기 때문에 키우기 시작했지만, 식물과 함께 살면서 나에겐 여러 가지 변화들이 있었어. 오감이 깨어났다고 할까? 키가 2미터에 가까운 나무에 물을 줄 때에는 한 번에 물을 2리터 정도 주거든. 겨우 물조리개에서 화분 흙으로 흘러내리는 거지만, 그래도 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귀를 자극해. 물을 다 주고 나면 화분 흙이 젖어 향이 풍기는데, 코가 살살 간지러워. 나한테 이런 소리를 듣는 청각세포가 있었나, 이런 향을 맡는 후각세포가 있었나 싶은 거지.  


  다 관엽식물인데도, 같은 초록이 아니야. 나는 색에 좀 예민하잖아. 형광 스킨답서스의 밝은 연두색에도 색상 차이가 있고, 수채화 고무나무의 잎은 아이보리색부터 자주색까지 넓은 색의 팔레트가 있어. 뱅갈 고무나무 잎엔 연두와 초록의 무늬가 그려져 있거든. 잎사귀의 그림자가 잎 위에 드리우면 한 톤 더 어두운 초록이 되는데, 녹색이 차곡차곡 넘어가는 게 참 예뻐.  


  그뿐이 아니야. 창문을 열면 바람결에 따라 잎이 춤을 추는데, 자기들끼리 몸을 부딪히며 소리가 나거든. 혹시 그런 소리 들어 봤어? 엄마가 아가 등을 두드리듯이 토닥토닥 소리를 낸다? 그럴 땐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어 보는 거야. 그럼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어. 내 안의 빙하가 조금씩 녹을 만큼.  


  식물들의 잎은 또 어떻고? 아레카야자의 잎은 가늘고 길게 쭉쭉 뻗지만, 떡갈 고무나무의 잎은 튀튀처럼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둥근 모양이지. 필레아 페페로미오이데스는 동글동글한 손을 직각으로 세우고 팔을 흔들며 바람결에 람바다 리듬을 타. 아로우카리아는 머리에서 헬리콥터 날개가 솟아 나오고.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내 머릿속에도 뾰족했다가 둥글어지고, 춤을 추는 생각들이 휘모리장단처럼 밀려왔다가 아다지오로 느릿느릿 넘어가.  


  그러면서 내가 나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야. 아, 이럴 땐 내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때 그 일은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겠구나, 그때 왜 그랬을까, 그런 짧은 단편 영화들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나는 깨달았어. 몇 날 며칠 꿈에 나오던 그 일들이 모두 나를 지나갔고, 그 경험이 발효되어 축적된 퇴적물이 곧 '나'라는 걸. 다양한 퇴적물이 쌓일수록 비옥한 땅이 되잖아. 그럼 나는 어딘가에 쓸모가 있겠구나 싶은 거야.


  그러면서 더 많은 식물을 만날 때의 내가 궁금해졌어. 이상하게 식물원에 끌리더라. 산에는 이름표가 없지만, 식물원에는 한 개 한 개 모두 이름표가 있거든. 궁금하면 바로바로 알 수 있으니까 더 좋았는지 몰라. 식물원에 관심이 생기고 가장 먼저 가본 곳은 창경궁 대온실이었거든. 재개장했다고 해서 삯 바람이 부는 겨울날 갔었는데, 그래서인지 실망이 컸어.  


  그다음에 가 본 곳은 신주쿠교엔. 도쿄에 있는 식물원인데, 두 손바닥을 쫙 편만큼 큰 수국의 송이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는데, 괜히 배가 아파서 충분히 느끼질 못 했어. 수직으로 뻗은 아름드리나무에도 슬펐어. 우리나라에도 전쟁이 할퀴고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거야.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인 거지.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도 식물원에 들른 거 알지? 나는 그곳이 너무 좋더라. 무려 17세기 동인도 회사에서 싣고 나른 식물들로 꾸민 대온실이 있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이래. 이웃 대학교와 협업이 이루어져, 온실에 디자인 요소가 곳곳에 보여. 다육이를 키우는 작은 화분, 각종 안내문의 시각 디자인들이 그래. 팸플릿에 그려진 식물의 일러스트는 연두색, 보라색 같은 배경색 위에 식물을 그려 심미적으로도 아름다웠어. 식물도 아름답지만, 모든 것이 아름다워.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온실에선, 내 마음 깊숙이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 들었지.  

  파리에서도 식물원에 갔어. 구글맵에 찍어 둔 위치 정보만 갖고. 어느 순간 너무 촘촘하게 알아보는 여행은 싫증이 났어. 여행은 설렘과 낯선 공기가 빚어내는 우연이 있어야 하는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건 그 화면이 현실세계로 펼쳐진 그 정도의 느낌이라,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더라. 최소한의 정보만 갖고, 내 직감과 내 발이 찾아가는 걸 그냥 지켜봤어.  

  식물원으로 가는 길은 괜히 뒷 꽁지가 가벼웠어. 발꿈치에 힘이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포니테일처럼 흔들리는 것 같았어. 파리 식물원에서는 마침 난초 전시가 한창이었는데, 사전 정보 없이 갔더니, 꼭 선물 같았어. 7유로 내고 입장한, 꽃이 잔뜩 핀 온실에서는 어지러울 만큼의 난초의 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세상에, 너무 호사스럽지 않아? 살아 있는 난초의 향기에 취하다니!  


  파리의 온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느껴졌는데, 허용적이랄까. 낙엽도 드문드문 보이고, 시든 식물도 보여. 하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그게 자연이니까. 그렇다고, 방치했다는 의미는 아니야. 반도체 실험 장비 같이 정교하게 설계된 온실용 난방 장치는 마른 나뭇잎 한 톨 없이 관리되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느껴졌거든.  


  그때 나는, 정말 중요한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낙엽을 주워 깨끗하게 하는데 인력과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 중요할까, 맞춤형 난방 설비에 비중을 두는 게 나은 걸까. 뭔가를 결정하는 기준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 애당초 건강한 식물이라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인 거잖아? 그런 건 그냥 두는 거지. 나무 하나하나 건강한 게 중요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그럴 거야. 한 명 한 명이 건강한 게 중요해.


https://youtu.be/vj6siHPRSuU 

작가의 이전글 망설여 질 땐, 그냥 하고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