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의 산문집 <호미>를 읽고, 살구나무가 갖고 싶었다. 아파트에 거주하던 박완서 선생은 휴전선 너머 옛 고향 개풍을 닮은 동네 아리울에 노란 집을 짓고 이사하신다. 사계절 내내 꽃이 피도록 정원을 가꾼 경험은 <호미> 속 생생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았다.
그 마당에 살구나무를 심고, 살구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명력에 대해, 살구의 생산성에 대해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하도 살구가 많이 열려 잼을 만들어 나누셨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한 병 주세요 떼를 쓰고 싶었다.
그 ‘살구나무’가 하도 궁금해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을 모두 뒤졌으나 실패하고, 뜻밖에 박완서 선생과 친분이 있던 화가 김점선의 책, <점선뎐>에서 사진을 발견했다. 살구꽃이 구름처럼 가지를 감싼 나무 아래로, 두터운 스웨터 차림의 두 분이 앉아 계신다. 살구나무 꽃은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 피는가 보다. 그렇게 꽃이 활짝 핀 살구나무가 마당에 있으면 기분이 어떨까?
재작년 여름, 나도 마당에 살구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해 열매를 다 거둔 늦여름, 이사 왔다. 그 해 열매를 많이 맺었다고 했는데, 시기를 잘 못 맞춰 그저 하트 모양으로 펄럭이는 초록잎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을이 되니 그마저도 낙엽이 되어 모두 사라졌다. 다음 해 여름엔 해거리인지, 자리를 옮겨서인지, 꽃이 피는 둥 마는 둥 했고, 열매라곤 겨우 세 알 떨어뜨렸을 뿐이다.
두 번째 봄을 맞는 올핸, 살구나무에 꽃이 꽃답게 피었다. 일주일 남짓 꽃이 머무는 동안, 구름 위에 올라앉은 기분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어 주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 도심지에 저 많은 벌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 걸까 싶을 만큼 꿀벌들이 단체로 나타나 이 살구꽃에서 저 살구꽃으로 관광 다니느라 바빴다.
꽃은 금세 져 버렸다. 그리고 곧, 비가 올 때마다 애기 살구들이 떨어졌다. 미안하고 아까워 어쩔 줄 몰랐다. 지난번 비가 내릴 땐 새끼손톱 만한 살구가 떨어졌고, 지난 비엔 엄지 손가락 만한 살구가 떨어졌다. 밤새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아침엔 살구가 하나도 없어, 몇 알 열리지도 않은 살구가 모두 떨어졌나 보다 싶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생명의 에너지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차오르는 6월. 달리기 후 스트레칭하며 바라본 살구나무 가지 사이로 동그라미가 눈에 들어온다.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붙여 만든 원만큼 자란 살구가 가지마다 맺혀 있다. 쭉정이들을 떨구며, 결실을 키우고 있던 것이다. 거센 비바람에도 단단히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만큼 자란 살구.
살구나무 옆에서 바라보다, 나무 아래로 걸음을 옮긴다. 고개를 90도로 꺾어 살구나무 바로 아래서 위를 올려다본다. 바람이 세게 지나갈 땐 잎들에선 솨르르 하는 소리가 난다. 낮은 데시벨의 편안한 소리. 비와 바람이 지날 동안, 그래도 물을 끌어올려 열매를 키웠던 살구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나도 영근 열매를 맺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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