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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un 16. 2020

레퍼런스의 두께만큼 이해한다

정진홍 작가의 <완벽에의 충동>

  작년 추석 즈음, 우리 집엔 새 식구, 반려묘가 생겼다.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한 브리티쉬 숏헤어. '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순하다. 860그램으로 온 녀석은 이제 5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별이는 적극적이다.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면, 기다리지 않고, 와서 몸을 비비댄다. 서로의 몸을 비비는 과정은, 옥시토신을 분비해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기분 좋은 순간이 된다. 배가 고프면 먹이 근처에 가서 니야옹하고, 냉장고 앞에서 빠른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서성이며 냐옹냐옹 거린다. 자기 요구에 충실하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별이는, 열어 둔 창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방충망과 유리창 사이의 공간에 몸을 끼워 넣고 앉아 있는 녀석은, 고체인가 액체인가. 어이구. 먼지 구덩이에 몸을 밀어 넣다니. 덕분에, 창틀을 닦고, 방충망도 뜯어 세척했다. 녀석은 방방 창문마다 탐색에 나섰다.


  며칠 전, 별이가 창가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앞집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앞집 고양이는 우리 집 창틀에 올라 와 별이와 만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서로, 반가운가 보다, 그냥 내 식대로 해석했다.


  어제 정말 집중해, 화분의 3D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뭔가 처음 듣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는 동안, 받침을 그려 넣었다. 이제 다 되어간다 생각하는 순간, 우루루룽 캬약 우루룽 퐈악 하는 소리 뒤로, 여성이 다급하고 높은 목소리로, "안 돼, 안 돼!" 하는 소리고 소리친다.


  짚이는 게 있어, 우다다닥 계단을 뛰어 올라가 보니, 아뿔싸. 창틀에 있던 별이와 앞집 고양이가 방충망을 할퀴며 서로 으르렁대는 한 판 대결이 벌어졌다. 방충망이 뜯겼다. 죄송하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이웃에게, "아이고... 얘네들이 사람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한다.


  포효하는 별이는 처음 보았다. 유전자에 잠재된 모습일까. 상대편 고양이가 없었다면 나는,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걷는 별이의 대찬 모습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을 경험해야 알 수 있는 일들.


  정진홍 작가는 <완벽에의 충동>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각자의 레퍼런스 두께만큼만 세상을 보고 느끼며 산다'라고 말한다. '경험해 본 감각의 기억들이 쌓이면 레퍼런스가 되고, 레퍼런스가 두툼해야 세상을 다양하게 다면적으로 또 입체적으로 게대로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느낌, 감성, 감각의 레퍼런스를 잘 키워내라'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레퍼런스만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니!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직접 해 본 일들은 세포에 더 오래 저장되지만, 세상 모든 일을 경험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그러니, 책, 영화, 음악 같은 간접 경험이 필요한 것이라고, 달리며 생각한다. 직접 경험은 때론, 삽질이 되기도 하지만.


  녀석은 오늘도 창가에 앉는다. 서로 공격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은 반가움의 표시였을까?


http://linktr.ee/jaekyung.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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