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킴 라일락
밤새 꿈을 꾸었다. 여러 가지 일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꿈속에서 나는 사고뭉치가 되었다가, 슈퍼맨이 되었다가, 변신 전, 변신 후를 왔다 갔다 했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모닝 페이지를 쓰고, 옷을 갈아입는다. 오늘은 옥상에 물을 주어야지.
내 우유 상자 텃밭에선 줄딸기가 줄기를 뻗어 나가고, 블루베리도 보라색으로 익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내가 찜해 둔 딸기가 있는데... 잎을 들어 요리조리 봐도, 딸기가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아뿔싸. 민달팽이 짓이구나. 어쩜 알맹이만 빼먹고 씨만 남겨 놓는 걸까. 씨가 붙어 있는 거죽은 말라 붙어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너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어. 나는, 기어이 민달팽이를 찾아, 제거한다.
옥상 위에서 풍성하게 군락을 이루던 미스킴 라일락 몇 그루가 말라 붙었다. 미스킴 라일락은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 조경용으로 사랑받는 라일락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47년, 미국인 식물 채집가가 북한산에서 야생의 수수꽃다리를 채취해 미국으로 가져가 원예종으로 개량했고, 그 당시 같은 사무실 여직원의 이름을 붙였다. -pmg 지식엔진연구소, 시사상식사전 참조-
이 수수꽃다리 개량종, 미스킴 라일락은 향이 진하고,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라일락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 되 사 오고 있다.) 나의 미쓰김 라일락들도, 척박한 옥상에서 잘 자라, 군락을 이뤄가고 있었다.
내 미쓰김 라일락에게 잘해 주고 싶어, 봄에 비료를 주었다. 실외니까, 알맹이 채로 줘도 되겠지 하고 봉투를 열어 고기에 소금 간 하듯 살살 살살 뿌려 주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몇 그루가 말라 붙었다. 비료 알맹이가 쏟아졌던 모양이다. 미안하고, 속상하다.
차라리 비료 주기 전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어깨를 활짝 편 미쓰김 같았는데. 내가 지나치게 사랑했구나. 자기 모습 그대로 잘 살고 있는데, 더 잘하라는 욕심이 화를 키웠다. 뭔가 더 해 주려는 마음을 누르고, 그저 지켜보는 것. 미쓰김 라일락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달리는 내내 속상하다. 민달팽이가 다 먹은 딸기와 말라 붙은 라일락 나무가 떠오른다.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잖아.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거야.' 애써 위로한다. 길에서 만나는 벌레들의 덩치가 커지고 있다. 뱀인가 싶어 다시 본 지렁이, 누군가의 발에 밟힌 알락하늘소, 성충이 되기 전의 선녀벌레도 보인다.
이렇게 생명력이 가득 차 오르는 6월. 나의 에너지도 풀 충전되어 있나. 스트레칭을 하며, 잡초를 뽑는다. 지난번 겨우 떡잎을 틔웠던 라일락 새싹이 새 잎을 두 개 올렸다. 저 아이는, 내게,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마당의 살구나무는 살구 네 알을 떨어뜨렸다. 벌레 먹고, 멍이 들면서도 계속되는 우리의 일상. 살아 있는 한, 삶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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