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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ul 18. 2020

제 힘 껏, 어울려 산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방충망에 곤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스타워즈 등장인물 제다이의 머리 모양이고, 옆에서 보면 비정형 삼각형이다. 크기는 새끼손가락 손톱 정도의 연갈색 생물체인데, 날아다닌다. 본능적으로 해충이라고 느낀다. 살충제를 이용한 화학적 제거 방법도 있으나, 생태계를 생각해 물리적 방법으로 제거하기로 한다.

  운동 에너지를 이용해 때려잡고 싶은데 방충망 밖에 있으니, 하는 수 없이 열 에너지를 이용하기로 한다. 라이터를 들고 적을 향해 불을 붙였다. 벌레는 열기가 느껴지면 도망갔다 다시 방충망으로 날아온다. 약이 오른다. 방충망 앞에서 벌레와 사투를 벌이는 나를 보며, 남편은 공포영화의 한 장편 같다며 질색한다. 나는 저 벌레가 나뭇가지에  열 지어 붙어 있는 것이 더 호러 영화 같은데.

  그 벌레의 이름은 ‘미국선녀벌레’이다. 나무에 알을 낳아, 나뭇가지가 안 보일만큼 달라붙어 나무가 죽을 때까지 수액을 빨아먹는다. 이 벌레는 나무 끝에 하얀 솜 같은 알들을 낳고, 시간이 지나면 거기서 스타크래프트 프로토스 종족 드래군을 닮은 유충이 나온다. 옆으로 걷는 걸음걸이도 비슷하다. 톡톡 튀어 옮겨 다니고, 성충이 되면 날아다닌다.

  이 벌레의 정체를 알게 된 다음부터 선제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얀 솜 같은 알이 보이기 시작하면, 약을 치고, 나무 가지 끝을 잘라 몰래 종량제 봉투에 넣어 함께 버린다. 살구나무 근처에 얼씬거리는 모습이 보이면, 또 방제한다. 세찬 물줄기로 씻어 버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튕겨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도 한다. 올해도 쑥부쟁이 끝에 촘촘하게 자리 잡은 보금자리를 벌써 한 차례 부쉈다.

  그날도 정원에 날아다니는 선녀 벌레에 눈살을 찌푸리고, 소탕하길 바라며 세찬 물줄기 공격을 하고 있었다.  분노에 찬 손으로 정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민소매 블라우스 사이로 생물체가 칩입해 배 쪽에 닿았다. 뭔가의 날갯짓이 느껴짐과 동시에 블라우스 자락을 들췄다. 그 녀석이었다. 미국선녀 나방이 후다닥 날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보다 징그럽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보지도 않고 미국선녀벌레라는 걸 알았을까. 가끔 바람결에 날리는 나뭇잎을 생물체의 움직임으로 느끼며, 고양이처럼 몸을 날려 발바닥으로 덮는 나를 발견할 때가 생각났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긴장하지 않아도, 이미 나의 감각은 다 알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임과 속도와 감촉과 소리와 온도에 반응하고 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스마트폰을 시야에서 거두고, 내 두 다리로 나무 사이를 달리며,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소리를 듣고, 내 코로 냄새를 맡고, 내 피부로 바람을 느끼며 나의 오감으로 들어온 정보를 켜켜이 쌓는다. 4월엔 왕겹벚꽃과 조팝꽃이, 5월엔 붓꽃과 금계국과 개망초가, 6월엔 장미가, 7월엔 능소화가 핀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입력된 정보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

  키가 가슴팍까지 자라며 샛노란 꽃을 피워 달리기에 즐거움을 더해 주었던 금계국은 제 철이 지나니 기세가 사그라들어, 이젠 무릎 높이에서 꽃을 피운다. 조팝나무 끝엔 미국선녀벌레의 알이 솜털 모자를 씌운 듯 부풀어 있다. 집안에서 잘 자라지 않는 에키네시아를 땅에 심으며 맨손으로 흙을 덮는다. 우린 그렇게 제 힘 껏, 어울려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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