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저녁 7시만 되어도 어두컴컴해집니다. 해가 한창때만 못합니다. 아침에도 일출 시간이 조금 늦어졌습니다. 한창 여름엔 5시 40분에서 아침 6시 사이에 집을 나서 산책길을 달렸습니다. 요즘엔 조금 이른가 싶어 오늘은 6시 30분 즈음 시작합니다. 밖에 나가 숨을 들이마시자마자, 채 기관지를 넘어가기도 전에 벌써 공기가 뜨겁다고 느낍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할 걸, 아쉬워하며 러닝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달리기 3종 세트 에어 팟, 애플 워치, 스마트폰에서 스마트폰만 들고 나왔습니다. 제가 쓰는 이어폰인 에어 팟엔 노이즈 캔슬 기능이 있어요. 외부의 소리에 맞게 주파수를 쏘아 소음이 느껴지지 않게 하는 기술입니다. 하얗고 동그랗고 부드러운 에어 팟을 왼쪽 오른쪽 귀에 꽂으면 암막커튼으로 빛을 차단하는 것처럼 소리가 닫힙니다.
그 이어폰으로, 39일 동안 멜론 일일 차트 1위를 차지했던 ‘다시 여기 바닷가’나 ‘신난다’ 같은 BPM 높은 노래를 들으며 달리기도 하고, 유키 쿠라모토의 로망스를 들으며 서정적인 러닝을 즐기기도 했지만, 여름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엔 이어폰 없이 긴 겨울을 위한 식량을 비축하듯 숲의 소리를 귀에 주워 담고 또 주워 담습니다.
산책로에 들어서자마자 귀에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립니다. 또르르 또르르 우는 귀뚜라미부터 쓰르르 쓰르람 소리를 내는 쓰르라미, 우렁차게 울어대는 매앰 매앰 소리의 주인공 매미도 있습니다. 저 멀리서 깍깍 거리는 까치에 짹짹하며 날아가는 참새까지. 흐르는 물소리를 베이스 삼아, 곤충이 내는 소리에 새들이 우는 소리까지. 오케스트라 협주를 실황으로 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벌레들이 통통하게 살이 찌는 계절입니다. 벌레를 먹이로 삼는 거미나 새들은 진수성찬의 시기이지요. 소리로 유추할 수 있는 곤충들도 많지만, 눈으로 보는 생명체도 많습니다. 오늘은 새까만 벨벳 슈트를 입은 것 같은 제비나비가 곁을 따라 날았어요. 마치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되어 풀밭을 달리는 기분이 듭니다.
어제저녁 식사를 하는데, 아들이 묻습니다.
“엄마, 엄마는 만약 내일 죽는다면 뭘 하고 싶어?”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처럼 살 건데?”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어?”
“응.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엄마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봤거든. 후회 없이 살려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대로 살아야겠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대로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에, 만약 내일 죽는다 해도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는 거 같아.”
“그럴 수가 있어?”
“응. 그럴 수가 있더라고. 그러면서, 내일 세상이 멸망하면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도 이해하게 됐어.”
“맞아. 왜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거지?”
“생각을 해 봐.”
“엄마는 어떻게 이해를 했어?”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건 혹시 누군가는 살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보는 거잖아.”
“아, 그렇구나.”
<한승원의 글쓰기 비법 108가지>라는 책에선, ‘말할 줄 모르는 생물이나 무생물에게서 말을 듣는다는 것은 말 저 너머의 말(진리)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 속에서 나의 참모습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요즘, 고양이도, 청설모도, 소나무도, 벚나무도 자꾸 말을 걸더라고요.
이른 아침, 우리 동네 산책길엔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아이부터 중학생, 당장 마라톤 대회를 나가도 손색없을만한 선수 포스의 파란 옷의 남성, 웨이브가 강한 흰머리의 할머니, 러닝 쇼츠와 팔 없는 소매의 러닝 티셔츠를 입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단단한 종아리 근육을 바라보며,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처럼,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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