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월 30일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때가 꼬질꼬질하고 주름이 잔뜩 진 낡은 분홍색 운동화에, 집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그저 달리는데 의의를 두었습니다. 제 딴에는 속력을 내 달린다고 달렸지만, 다른 이가 보기엔 걷는 속도나 다를 바 없었을 거예요.
시작할 땐 러닝을 위한 준비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며칠 달리니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새하얗고, 주황색 하늘색 연두색 구슬이 잔뜩 들어 있는 러닝 전용 새 운동화를 구입했어요. 제 무릎은 소중하니까요.
몇 번을 버리려다 미쳐 버리지 못 한, 엉덩이까지 길게 내려오는 검은색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달렸습니다. 그 옷은 펑퍼짐해 몸을 잘 가려주니 안에 무슨 옷을 입었던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신 옷이 묵직하고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그 옷을 입고 달리다, 처음으로 새로 구입한 러닝복 티셔츠를 입었던 날, 몸이 얼마나 가볍던지, 구름 위까지 달려갈 수 있을 듯했어요. 따뜻한 공기, 가벼운 러닝 티셔츠, 몸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날은 통각, 후각, 청각, 시각, 촉감으로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티셔츠 한 장이 주는 해방감으로는 과분할 만큼이었어요.
요즘 아침 일찍엔 날씨가 쌀쌀해 가벼운 티셔츠 차림으로 달리기엔 부담스럽습니다. 다시 까만 맨투맨 티셔츠를 꺼내 입었어요. 잊고 있었던 불편함이 온몸을 누릅니다. 즐거운 달리기에 스멀스멀 짜증이 배어 나올 만큼요.
아주 더운 여름에도 티셔츠 한 장, 아주 추운 겨울에도 티셔츠 한 장, 그렇게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견디는 담대한 육체는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걸까요? 에어컨을 켤 때마다, 난방 스위치를 돌릴 때마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정휘창 작가의 '원숭이 꽃신'이 생각납니다.
원숭이는 맨발로 숲을 다니니 발에 군살이 잔뜩 배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소리가 원숭이에게 꽃신을 공짜로 준 거예요. 막상 신어보니 발이 따뜻하고 폭신하고 편리합니다. 오소리는 꽃신을 잣을 받고 파는데요, 원숭이 발에 군살이 다 사라진 즈음 오소리는 아주 비싸게 꽃신을 팝니다.
불쌍한 원숭이. 꽃신을 사 신으려 잣을 주워야 했거든요. "그냥 벗어버려! 다시 군살이 생기게!"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동화는 어른이 되어 지금까지도 계속 생각이 났어요. 지금도 편리함이라는 이유로 저당 잡히는 자유가 종종 느껴집니다.
비가 자주 내린 이번 여름은 많이 덥진 않았지만, 어쨌든 산책길을 달리며 저는 땀을 뻘뻘 흘리는 불편을 감수하며 여름에 달릴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번 가을을 지나 겨울엔 어떨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초록물이 빠지기 시작하는 나무색이 덜 섭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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