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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Oct 02. 2024

아무런 저항 없이 밝고 행복하게


데이비드 호크니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표지를 넘기자 샛노란 개나리색 종이 위에 '나는 항상 관찰자였다. 그것이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다.'라고 쓰여 있다. 지난 주의 일이 떠오른다. 


지난주 금요일의 저자이자 나무 의사인 우종영 선생 강연에 갔다. 강연의 제목은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였다. 산속을 누비고 다니며 나무를 치료하는 우종영 선생은 프로 사진작가다. 스크린의 발표 자료에선 깊은 산속에서 나뭇가지에 맺힌 이슬이 해를 받아 반짝이는 모습, 속은 비었지만 그래도 새 가지를 뻗어 자라는 나무가 보인다. 


그중, 메타세쿼이아 나무 네 그루가 겹쳐 자라는 사진이 있다. 맨 왼쪽의 나무는 왼쪽으로만 가지를 뻗었고, 중간의 두 그루는 가지와 잎이 짧게 자랐다. 맨 오른쪽의 나무는 오른쪽으로만 가지를 뻗었다. 그래서 사진 속 나무들은 멀리서 보면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인다.


자연은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비밀을 속삭여준다. 그 속삭임을 모아 담는 사람을 위스퍼러(Whisperer)라 부른다. 우종영 선생은 자신을 위스퍼러라고 칭한다. 속삭임엔 치유의 효과도 있어, 위스퍼러는 치유자라는 의미도 있다. 선생은 '나무는 빛이 디자인하고 바람이 다듬는다'라고 말했다. 지난번 만남에선 "숲에선 시간이 천천히 흘러요"라고 말했다.


강연이 끝나고 인사를 나누려 서 있는 내게 선생은 일행들과 목을 축이러 간다며 동행하겠느냐 물었다. 자연 속에선 늘 예측하지 못한 우연과 돌발상황이 생긴다. 당연히 가겠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세상은 평면으로 보인다. 정확하고 빠르지만, 생명력이 없다. 오로지 대상체를 마주 보고 같은 시공간에서 소통할 때 살아 숨 쉬는 감각이 느껴진다. 개포동 길을 걸으며 잎을 늘어뜨린 가문비나무, 250살쯤 된 느티나무와 인사를 나누며 걸었다.


동행은 여성 한 명과 남성 한 명. 모두 식물 공부를 하는 중이라 했다. 투다리에서 맥주와 막걸리를 앞에 놓고 우린 나무, 식물, 인생, 글쓰기에 대한 폭넓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중 여성분은 굵은 펌 헤어스타일에 검은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피부에서 윤이 나고 안경 너머로 눈이 반짝거렸다. 50대일까, 60대일까. 55년생이라 했다. 요즘은 외모로는 나이를 알 수 없다곤 하지만 깜짝 놀랐다.


그녀는 네 살이라고 생각하고 산다고 말했다. 나도 글을 쓸 때는 열두 살이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네 살처럼 웃으며 열두 살은 무거운 나이라고 말했다. 그즈음은 사춘기와 가까워지고, 실존적 고민이 시작되는 시간이라고. 네 살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밝고 행복할 때라, 그녀는 네 살이 더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마음속에서 뱅뱅 돌았다. 열두 살, 네 살. 몇 살이면 어떤가. 어차피 그건 내가 정하는 거다. 다만 네 살이라고 생각하니 계속 웃음이 나왔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당시의 기분은 항상 작품에 드러난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40대에 청력을 잃었는데,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을 때 공간이 평평하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고 전한다. 우리의 기분도 우리의 글에 드러난다. 감정도, 사실도 감추려 하면 감추려 할수록 글은 곤죽이 된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예술은 환희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열두 살의 내가 쓰는 글은 진지하다. 나는 지난주 금요일부터 네 살이 되기로 했다. 우리 아들이 네 살이었을 때 그 아이가 하는 말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와 같았다. 자동차 통풍구에서 눈, 코, 입 모양을 찾아 "웃고 있네?" 하던 그 눈을 기억한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하루하루 가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요즘 길을 잃었다. 여섯 권의 책을 썼는데, 이제 뭘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맴도는 개미가 된 것 같았다. 이 길을 앞서간 사람들 눈엔 다 보이는 모양이다. 정세랑 작가는 다음 책을 기다리고 있다며 옆구리를 찔렀고, 우종영 선생은 "그냥 쓰세요. 그냥 계속 쓰세요."라고 말하며 부추겼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무언가 하던 일을 멈춘다고 해서 이전 작업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이제 충분히 해 봤으니 이제는 다른 구석을 바라보고 싶은 거다.'라고. 네 살이 된 나는 궁금한 게 많아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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