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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Sep 24. 2024

그건 달린 게 아니라 걸은 건데?

완벽하지 않아도 나아지고 있다

모닝페이지를 쓰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짧은 남색 반바지와 '우린 집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라고 쓰인 라이프집의 검은 티셔츠를 벗고 짙은 회색 러닝 쇼츠와 검은색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검은 나이키 로고의 베이지색 모자를 눌러쓰고, 손목에는 애플 워치를 두른다.

스마트폰을 째려본다. 마음속에선 아무것도 없이 달릴 때의 자유로움과 순간을 기록하고 싶을 때 아무것도 없는 허탈함이 힘겨루기 중이다. 이내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혹시 너무 멋진 글감이 떠오르면 적어야 하니까. 이어폰을 꽂고, 스포츠용 선글라스를 낀다. 다리를 가슴팍까지 올리며 준비 운동을 한 다음 나이키런 앱 시작 버튼을 누른다.

나는 늘 같은 옷과 같은 모자와 같은 운동화를 신는다. 과정에서 망설이는 시간을 쓰면 5분, 10분이지만 그 시간이 모이면 또 몇십 분이 훌쩍 지나게 된다.

시간의 유한함을 생각하면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기가 아깝다. 달리기뿐 아니라 동선이 같은 다른 일도 함께한다. 예를 들면 장을 보거나 책을 빌려오는 일 같은 것.

시간 위에 여러 가지 일을 끼워 넣어 레이어 하는 방법은 미국의 정원가이자 동화작가였던 타샤 튜더에게 배웠다. 타샤 튜더는 아이 넷을 키우면서 소와 닭과 함께 살며 우유와 버터를 만들고, 정원을 가꾸고, 인형을 만들고, 전국으로 인형극 공연을 다녔고, 동화작가로 칼데콧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나중에 작가가 된 딸 베서니 튜더가 엄마에게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했느냐 물었더니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나도 여러 가지 일을 함께 쌓는다. 집에서 3킬로미터 거리에 청과물 가게가 있다. 싱싱한 배추, 버섯, 오이, 당근을 만나면 바로바로 계산대로 옮긴다. 여러 가지 야채에 계란 한 판까지 샀던 날, 사장님은 내게 물었다. "이거, 다 들고 가실 수 있겠어요?"라고. 20리터 봉투 두 개가 가득 찰 만큼의 분량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 한번 해 보지요, 뭐!"라고 큰소리쳤다.

한 개에 10킬로그램은 될 법한 봉지를 들고 다시 3킬로미터를 걸었다. 그냥 들고만 걷기엔 지루했다. 봉지를 아령인 셈 치고 팔을 직각으로 접은 다음 양쪽으로 벌렸다 오므렸다 팔운동을 하기도 하고, 봉투를 내렸다 올리며 삼두근을 자극했다. 사실 너무 무거워 중간에 몇 번 쉬기도 했지만 나는 끝끝내 봉투 두 개에 가득한 먹거리를 안전하게 옮겼다.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을 빌리고 나면 여덟 권, 아홉 권이 될 때도 있다. 왼손과 오른손에 네 권씩 나눠 들거나, 가슴팍에 기대 안고 온다. 그러는 새에 앱에 기록된 달리기 평균 기록은 조금씩 늦어졌다.

하루는 나이키 러닝 앱에서 달리기 종료 버튼을 누르는 걸 잊어 온종일 켜져 있었던 적이 있다. 7~8킬로대에 머물던 내 평균 속도는 10킬로대로 늘어나 버렸다. 내 러닝 라이프에 흠집이 나는 것만 같았다. 왜 기록을 단축해야 하는 걸까? 운동선수도 아닌데, 왜? 앱에 기록된 수치는 달라졌어도 달렸다는 사실은 사실이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은 자서전에서 절대 무리하지 않고 능력의 80% 정도만 쓴다고 말씀하셨다.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이 소심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아프면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회복에 시간이 걸리니 오히려 손실이었다. 최소 시간으로 세팅해 둔 내비게이션엔 신호등이 없는 도로가 우선이다.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것은 성과를 내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레드에 누적 달리기 2600킬로미터의 기록을 올렸다. 내 기록을 본 어떤 이가 댓글로, '이걸 달리기라고 할 수 있나? 이건 걸은 게 아닌가?'라고 남겼다. 아마도 그는 작은 키에 짧고 굵은 다리를 가진 나와는 달리 육상선수처럼 키가 크고 다리가 긴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우리가 종종 잊는 것은 '그런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귀찮음의 중력을 무릅쓰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땀을 흘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꼭 100점이 아니어도, 완벽하지 않아도 이런 나를, 이런 우리를 따뜻하게 사랑해 줄 순 없을까. 땀을 뻘뻘 흘릴 만큼 열심히 움직인 짧고 굵은 내 다리를 더욱더 사랑하기로 했다.

달리는 뇌 의학자 정세희 교수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이 올라왔다. 건강한 뇌를 위해선 달리기가 가장 좋다며 달리기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그의 게시물엔 37.12킬로미터를 6킬로미터 속도로 3시간 42분 동안 달린 기록이 올라왔다. 3시간 42분 동안 달리고도 거뜬한 체력이 되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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