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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Sep 17. 2024

할아버지의 복근 운동 | 관찰하기




딩동. 메일함에 새 메일이 도착했다. 송신자는 중랑구 모 도서관이었다. 3주간 매주 목요일마다 ‘식물 인문학’ ‘실내 가드닝’ ‘플랜테리어’ 등 실내 식물과 건강하게 보내는 법을 다뤄달라는 요청이었다. 날짜를 확인하니 출강할 수 있었다. 바로 수락하는 메일을 보냈다.


도서관이 위치한 곳은 서울특별시 중랑구이고, 내가 사는 곳은 성남시 분당구다. 강연을 요청한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2시였다. 막히지 않을 땐 4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트래픽 잼에 걸리는 시간엔 2시간 가까이 소요됐다. 


강연자는 좋은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현장에선 정보와 경험뿐 아니라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2시간을 길에서 보내고 떨어진 심박수로 강연에 서고 싶진 않았다. 막히는 길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다른 더 좋은 방법을 찾고 싶었다. 




출근 시간 시작 전 아주 일찍 가거나, 퇴근 시간이 끝나고 난 다음 아주 늦게 가면 금세 갈 텐데. 그렇다. 아주 일찍 가는 방법이 있었다. 왜 준비를 다 하고 집에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다. 집에서 바로 나가 강연장 근처에서 씻고 준비하는 방법은 어떨까?


강연장 근처엔 봉화산 공원이 있었다. 마음먹으면 아침 운동도 할 수 있었고, 사람 사는 곳이니 당연히 목욕탕도 있었다. 나는 아예 출근 시간이 시작하기 전 집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옷, 구두, 목욕 도구를 챙기고, 운동복을 입은 채 6시에 출발해 7시에 도착했다.


중랑구민회관에 주차한 다음 봉화산 공원에 올랐다. 데크로 만든 길을 따라 올랐다. 처음 가 보는 곳이지만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운동기구가 있는 체력단련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든 운동기구에 사람들이 있었다. 철봉엔 등산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매달려 있었다. 그의 머리엔 새하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았다. 어깨가 괜찮을까 마음이 쓰였다. 그가 두 팔로 철봉을 잡고 몸을 봉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더니 연달아 10개를 해치웠다. 유튜브 숏츠에서 본 20대 트레이너의 턱걸이 속도보다 가볍고 빨랐다. 


그 옆엔 네발 기기 자세를 한 다음 덤벨을 양손으로 잡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무릎은 고정한 채 데크 위에 덤벨을 굴리며 코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덤벨이 몸 밖으로 밀 때 드르륵 소리가 들렸고, 몸 안쪽을 향할 때 또 천둥소리가 났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코어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곳에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동에 깊이 빠져 있었고, 성실한 매일은 몸의 속도와 꼿꼿함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봉화산 정상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의 움직임이 드럼 소리처럼 경쾌하게 보인다. 얼른 내려와 목욕탕을 찾았다. 8시 30분. 목욕탕엔 나 말고 두 명이 더 있을 뿐이다. 모두가 바쁜 일상의 시간이다. 출근하는 직장인, 등교하는 학생, 집 안을 정리하는 사람, 모두 각자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낯선 곳에서 운동과 목욕은 마치 여행을 온 것처럼 재미있었다. 강연에서도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신도림역에서 진행된 강연에 가던 길이었다. 토요일이라 차가 막히는 걸 피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앉아 이동할 수 있었다. 오디오 북을 들으며 지하철 내부를 관찰하다 운동을 시작했다. 


긴치마 속 두 발을 모아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딛고, 허벅지 양쪽을 붙여 힘을 주며 근육 운동했다. 다리를 살짝 들면 코어와 아랫배에 더 큰 자극이 들어갈 텐데. 지하철 내부에 사람이 별로 없어 다리 앞쪽에 공간이 넉넉했다. 살짝 들고 내리며 코어 운동을 하는데, 옆자리 할아버지 다리가 나와 같은 각도가 아닌가. 할아버지도 다리를 모아들었다 내리며 코어 운동을 했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나보다 더 오래 다리를 들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는 길에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이어령 선생이 ‘이런 책은 내가 써야 했다’고 말했던 책, 《생각의 탄생》에선 생각의 도구로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 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다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의 열세 가지를 꼽는다. 길에선 의식하지 못한 채 열세 가지 생각의 도구를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다. 길 곳곳엔 스승이 있었다. 


사진은 봉화산 공원입니다.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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