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시간 축적의 힘
띠리리리, 띠리리리. 베개 아래에서 알람이 울린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켜 양말을 신는다. 슬리퍼에 발을 밀어 넣고 드레스룸으로 열다섯 걸음 걷는다. 2미터, 2.4미터의 작은 공간은 고요하다. 물푸레나무 책상에 앉아 서랍 속 노트를 꺼낸다. 작은 창문엔 새벽의 남색이 비친다.
왼쪽 눈을 감은 채 검은 연필을 들고, 노트 위에 5시 59분이라 적는다. 스테들러 마스 루모그래피 블랙 연필로 종이 위에 글을 쓴다. 만년필로 오래 써 왔는데, 글씨가 풀린 신발 끈처럼 흐물흐물해져 연필로 바꿨다. 연필은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써야 흑연이 종이에 묻는다. 모조지와 연필심이 만나면 신발이 눈을 밟을 때처럼 뽀드득 소리가 난다.
매일 아침 종이 위에 마음을 털어놓는다. 구질구질한 삶의 이야기를 종이에 이른 덕에 입을 단단히 걸어 잠글 수 있었다. 아름답기만 한 삶은 없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벌레도, 먼지도, 시든 잎이 득시글거리지만 멀리서 보면 싱싱한 초록 잎으로 가득한 여름 숲과 같다. 오늘도 세 바닥을 적었다. 마지막 문장은 ‘한 번에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였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쓴 아침이 2739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매일 할 수 있느냐 묻는다. 그런데,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냥 양치하듯, 세수하듯 매일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하다 보면 어느새 1일, 3일, 7일, 30일, 365일, 2739일이 되어 있다. 시간은 빨리 감거나 뒤로 돌릴 수 없다. 2739일이 지나야 2739일이 된다.
아침 글쓰기는 아무 목적성이 없다. 한 마디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일이다. 그런 일에 2739일을 썼다는 것은 한편으론 덜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일을 2739일 동안 계속할 수 있게 한 마인드 셋이 있다.
마음이 움직여 하기로 한 것에 대해선 의심하지 말고 스스로를 믿어 보는 게 좋다.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루 20분 정도를 쓰는 것인데, 그걸 어렵게 여기고 아까워하는 마음은 작은 마음이다. 스스로에 대한 기본 세팅 값을 20분 정도를 쓰고도 남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겨우 20분! 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0분이나?’라고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 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어보면 좋겠다.
두 번째는 너무 잘하려 애쓰지 않는 게 좋다. 쓰다 보면 아무도 보지 않는 이 사소한 행위마저 잘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게 된다. 노트에 글씨가 삐딱해지면 반듯하게 쓰려 애쓰고, 한 줄이 비뚤어지면 왠지 불안하고, 틀린 글씨가 나타나면 불완전함에 치를 떤다. 그런데, 계속 쓰다 보면 비뚤어지고 삐딱하고 틀리는 게 아무렇지 않아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냥 쓰는 동안 어떤 경우에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싹튼다.
세 번째는 예쁜 노트와 마음에 드는 필기구를 준비하는 것이다. 마음은 무엇보다 강하다. 아무리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도 억지로 할 순 없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만 할 수 있다. 수많은 만년필과 연필과 샤프와 샤프심 등 필기구를 테스트하며 느끼게 된 것은 파란 잉크, 초록 잉크, 갈색 잉크 등 잉크색에도 반응해 글 쓰는 시간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노트도 마찬가지다. 줄이 있는 노트, 빈 노트, 큰 노트, 작은 노트에도 모두 속도가 달라진다. 종이의 질감도 처리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매일 마음을 종이에 옮기면 입을 조심할 수 있다. 꼰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SNS를 떠돌곤 하는데, 긴장해야 하는 사실은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근육에 힘이 빠지는 것처럼 마음에도 힘이 빠진다.
마음을 꼭 누르고 있던 단단한 밴드의 힘이 느슨해지며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야 할 말이 튀어 나간다. 쓰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을 정리해 말할 수 있고, 해야 할 말 안 해야 할 말 가릴 수 있다. 실수는 보완하고, 잘한 것은 더 잘할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매일 쓰며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세상에 시끄러운 소리 하나 더하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그저 노트에 썼다.
2024년도 다 지나갔다. 내 노트는 3개월에 한 권을 쓰게 되고, 일 년이면 4권의 노트가 남는다. 앞으로 몇 권의 노트를 더 기록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남은 시간과 남아 있는 시간을 자꾸 재 보게 되는 1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