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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소설 빨간 모자

그날은 조용했다. 거실 너머로 부엌문과 안방문이 나란히 열려 있는데 안쪽에선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윤정이는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 바깥 방향으로 돌려놓은 다음, 댓돌을 딛고 올라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박달 마루에선 삐거덕 소리가 들렸다.


윤정이는 방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았을 때, 유리 너머 햇빛이 가득 쏟아졌다. 눈을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뜨고, 파란 하늘 위로 미끄러지는 구름을 보았다.


윤정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 속에서 빨간 사과 한 알을 꺼내 씻었다. 행주에 물기를 닦는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한 입 베어 물려다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벽장 책꽂이엔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나란히 꽂혀있었다. 식탁 의자를 놓고 올라가 책등에 쓰여 있는 책 제목을 읽었다.


《소공녀》 《작은 아씨들》 《알프스의 소녀》 《플란더즈의 개》. 윤정이는 망설이며 책을 고르지 못한다. 눈을 가만히 감고 책 등을 손으로 쓰다듬다가 손이 멈추는 곳의 책을 뽑았다. 《십오 소년 표류기》였다.


윤정이는 파란 책과 분홍 사과를 손에 들고 방으로 갔다. 창 아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릎을 접어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무릎 위에 책을 올리고, 책에 눈을 고정한 채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즙이 책에 튀어 작은 북두칠성을 그렸다. 윤정이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옷소매로 책갈피를 쓱쓱 문질렀다. 곧 윤정이는 책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었다.


표류했다 살아 돌아온 아이들이 기념사진 촬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엄마는 아들의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서 있을 때는 단추를 잠그고, 앉았을 때는 재킷 단추를 풀라고. 엄마들은 바지 바깥으로 빠져나온 셔츠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 순간 갑자기 “언니!!!!!! 우리 꼭꼭 숨어 있었는데 몰랐지?”하며, 웃음소리가 쏟아진다. 윤서와 윤지였다. 동생들은 팔을 잡고 놀아달라고 조르는데, 윤정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윤정이는 사과를 베어 물며 지금은 책을 보고 싶다고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 뒤에 서 있던 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정이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언니가 텐트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라고.


“텐트?”

“응. 텔레비전에서 봤잖아. 그 텐트. 언니가 텐트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윤아가 다시 말했다.

맞다. 그런 약속을 했었다.


“엄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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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경 식물인문학자···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8년째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쓰는 사람. 10년간 식물 200개와 동거하며 얻은 생존 원리를 인간 삶에 적용, 식물인문학 기반 라이프 리디자인을 통해 회복탄력성을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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