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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속았다

소설 빨간 모자

by 정재경 식물인문학자 라이프리디자이너

버스에 타면 늘 기사 아저씨 뒷좌석에 앉았다. 아저씨는 발꿈치를 바닥에 대고, 세 개의 페달을 오가며 밟았다 놓으며, 막대가 긴 기어를 움직였다. 기어를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올릴 땐 차 속도가 늦어지며 드륵 드르륵 숨찬 소리가 났다. 덩치 큰 버스가 좁은 골목길에서 좌회전을 할 때면 건물에 부딪힐 듯 아슬아슬했다.


아저씨는 핸들을 왼쪽으로 여러 번 감아 돌리며, 사이드미러가 간판에 닿을 듯 말 듯하게 커브를 틀었다. 창밖 너머 보이는 대림시장 골목길 양옆으로는 빨간 벽돌집과 간판이 빼곡한 상점들, 그리고 간혹 보이는 공중전화 부스와 빨간색 우체통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코너에 회색 건물이 있었다. 건물 벽에 걸린 너도밤나무 간판엔 검은색 페인트로 ‘강어지-루 의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무색과 페인트색의 대비가 선명했고, 니스를 발라 보호막이 생긴 간판은 바람이 불 때마다 햇빛이 부딪혀 반짝거렸다.


병원 근처엔 문방구가 있어서 그 주변은 늘 분주했다. 문방구 앞 가판대에서 딱지를 구경하는 아이, 사탕을 고르는 아이가 있었고, 게임 앞에선 아이들 서넛이 몸을 쪼그리고 앉아 연신 버튼을 눌러댔다. 아폴로를 입안에 넣고 쪽쪽 빨아먹으며 집에 가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날, 숨을 쉴 때마다 코에서 한여름 아스팔트처럼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고 느꼈다. 머리는 어질어질해서 현실인지 꿈인지 왔다 갔다 했다. 목이 퉁퉁 부어 물 한 모금 삼키기도 어려웠다. 목구멍 주변에 힘을 빼고 천천히 호흡하면 견딜 만했지만, 침이라도 한 번 삼키려 하면 얼굴부터 목, 어깨, 척추까지 온몸의 근육이 바늘로 긁는 것 같았다. 몸이 자꾸 옆으로 기우는데 간신히 수업을 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강어지루 의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병원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관음죽이 반겼다. 진료실 밖 복도에는 가로로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고, 등받이 중간엔 흰 바탕에 초록색 버드나무와 함께 ‘유한양행’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유한양행’은 군데군데 페인트가 지워져 나무색이 드러났고, 사람들이 오간 좌석은 닳아 반들반들 윤이 났다.


나는 의자 끝에 앉아 발걸이에 뒤꿈치를 올렸다. 나무로 만든 의자에서는 나뭇결이 일어나 가시에 찔려 피가 난 적 있었다. 앉아 있을 뿐인데 긴장이 되었다.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병원 바닥을 보았다. 회색 돌 사이사이 작은 돌이 심어져 무늬를 이루는 테라조 패턴이었다. 돌과 돌 사이엔 마감재로 동 파이프를 넣어 마감해 마감선이 생겼다. 회색과 구리색의 조화는 묘하게 안정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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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째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쓰는 사람. 10년간 식물 200개와 동거하며 얻은 생존 원리를 인간 삶에 적용, 식물인문학 기반 라이프 리디자인을 통해 회복탄력성을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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