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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경 Jun 12. 2017

스팸

새파란 봄날의 슬픈 기억

동생은 똑똑했다. 뭐든지 나보다 잘 했다. 심지어 걔는 공부를 안 해도 100점을 맞았다. 나는 그래도 꽤 공부해야 겨우 100점을 맞을 수 있었는데. 게다가 걔는 본능적으로 엄마 마음에 드는 법을 알았다. 그런 똑똑한 동생이랑 둘이 노는 게 어떨 때는 재미있었지만, 대부분 얄미웠다. 둘째는 내겐 거추장스러운 셋째 넷째를 데리고도 잘 놀았고, 걔의 그런 점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 동생이 요 며칠 전부터 계속 시들시들했다. 엄마와 동생과 같이 동네에 있는 강어지루 의원에 갔는데 감기에 배가 아플 수도 있다며 약을 처방해 주셨다. 동생은 계속 약을 먹었는데도 배가 아프다며 허리를 펴지 못했다. 얼마나 아픈지 가늠하지도 못 하면서 '기집애, 아프지도 않으면서 왜 엄살이야.' 속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2~3주가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고, 의원에서는 큰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동생은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근 한 달 동안 동생 얼굴을 보지 못 했다. 삼십 몇 년 전 의술로는 맹장으로 보고 개복했는데, 암이라고 했다. 9살 내가 처음 들은 병, 암. 감기나 몸살, 수두, 홍역 같은 병은 들어봤는데 암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사전을 뒤져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책이라면 다 읽어 치우는 내가 못 들어본 어른들의 세계에 있는 병.


어른들 눈치를 보니 간단한 수술이 아닌 것 같았다. 집에 들른 아빠와 아빠 친구의 대화를 들으니, 내장에 생기는 티눈 같은 병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제발 죽지만 말라고 매 순간 기도했다. 내가 공부 열심히 할 테니까, 너는 꼭 살아 돌아야 해. 이 나쁜 년. 왜 아프고 지랄이야. 떨어지는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른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엄마는 이제 동생 문병을 와도 좋다고 했다. 나는 너무 신이 나서 사촌 오빠를 따라나섰다. 처음 보면 어떻게 말하지? 무슨 말부터 하지? 서먹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입원실 문이 열리자마자 우린 서로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동안 내 기도가 통했던지 동생의 환자복은 낯설었지만 머리카략을 양 갈래로 땋은 동생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전쟁은 퇴원해서부터 시작됐다. 둘째는 아무것도 먹지 못 하고 누워 링거만 맞고 있었고, 저렇게 토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 토했다. 엄마는 우리가 조그만 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다. 싱싱한 세 마리의 새끼를 보살피며, 시들어 가는 한 마리를 지켜야 하는 어미의 심정. 열 살의 내가 거기까지 헤아리긴 너무 어려웠다.


환자가 잘 먹어야 하니 집에서는 하루 종일 곰탕 끓이는 냄새가 났고, 우리도 같이 그 음식을 먹어야 했다. 둘째가 잘 먹지를 못 해 엄마는 발을 동동 굴렀고, 미안하게도 한참 먹성 좋은 우린 더 먹지 못 해 안달이 났다. 스팸을 구웠던 어떤 날, 둘째는 다행히도 밥을 잘 먹었고, 신기할 정도로 잘 먹는 둘째를 보며 정말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처럼 내게도 맛있는 저녁이었다. 그렇지만 건강한 우리에겐 겨우 한 조각씩 배급되었다. 더 먹겠다는 나와 엄마는 큰 싸움이 났고, 나는 그때 죽어버려!라고 입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말을 휘둘러 버렸다.  


여전히 스팸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마음 아픈 말.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나고, 계속 미안하고 아직도 후회스럽다. 며칠 전, 그때 내 나이 즈음된 아들과 스팸을 먹다 이 이야기를 했다.

"헐! 엄마는 할머니랑 하늘나라에 간 이모한테 얼마나 미안하려고 그런 얘기를 했어."

"그러게... 그래서 지금도 너무 미안해."

그때 난 왜 그런 얘기를 던져 버려서 지금도 미안해할까.


그 후로도 수술하고 입원하고 힘든 투병 생활이 되풀이되었고, 병세가 악화될 때마다 나는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동생은 종종 내게 편지를 썼고, 언니랑 같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얘기들이 많았다. 나도 동생에게 어서 털고 일어나라고, 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너도 최선을 다해 싸워 이기라고, 너랑 같이 학교에 가고 싶다고 답장을 했다. 열 살 열한 살짜리 나는 힘든 일이 힘든 일인지 몰랐다. 꺼져가는 동생 앞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게 아니다.


5학년이 되던 해, 둘째의 새 담임께서는 나를 불러 동생의 3학년 교과서를 주셨다. 어른들은 이미 불꽃이 되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던지, 내게 주신 책들은 새 교과서가 아니었다. 나는 둘째가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아끼고 아껴 모아둔 포장지로 교과서를 모두 꽁꽁 싸서 갖다 주었다. 마음이 아프게도 똑똑한 동생은 금방 알아차렸다. "새 교과서가 아니네..."


그리고 꽃피는 봄날, 둘째는 하늘나라로 갔다. 내가 조금 더 성숙하고 속 깊은 언니였다면 그날 스팸 접시를 모두 동생 앞으로 밀어줬을 텐데. 어서 먹고 암 따위는 이겨내고 일어나라고, 사실해 주고 싶은 말은 그거였을 텐데 왜 그랬을까. 그날 내가 양보했다면 둘째는 더욱 힘내서 병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동생이 떠났던 새파란 봄날. 언젠가 무지개다리 너머 만날 동생에겐 그때 너무 미안했다고, 그래서 니 말대로 네 몫까지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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