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 파스타
뭐 하나에 빠지면 파고들어 덕후가 되는 기질은 육아휴직이라고 봐주지 않고 발현되었다. 그런데 어쩜 이리도 길을 잘못 들었는지, 나는 육아가 아닌 요리에 빠지고 말았다. 육아는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혼돈 그 자체지만, 요리는 레시피대로 정확하게 하면 나름 그럴듯한 음식이 완성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마꼬가 잠들고 부엌에도 밤이 내려앉은 시간,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요리 영상을 보았다. 요리 유튜버의 영상뿐 아니라 넷플릭스에 있는 요리 리얼리티쇼, 다큐멘터리, 영화를 챙겨봤다. 셰프들이 요리의 이름을 시적으로 짓고 요리에 담아낸 의미를 설명하는 모습에 푹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다. 물소리와 그릇들이 서로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한 부엌에서 요리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마음이 평온했다.
요리가 왜 좋은지 알아?
왜 좋은데?
직장 일은 예측불허잖아. 무슨 일 생길지 짐작도 못하는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섞으면 크림이 되거든. 맘이 편해.
-영화 <줄리 & 줄리아> 중
하지만 요리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레시피대로 해도 매번 음식 맛이 다르고 실패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내겐 비트 파스타가 그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나디야의 초간단 레시피>에 나오는 비트 파스타는 예쁜 자줏빛깔만큼 레시피도 간단하고 맛도 좋다면서 프로그램 호스트인 나디야가 강력하게 추천한 요리다. 태어나서 비트를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나는 그 맛이 몹시 궁금해 다음 날 바로 재래시장에 갔다. 한 개에 이천 원인 비트는 크기가 두툼해서 가성비가 좋아 보였다.
저녁 메뉴를 묻는 아내에게 오늘은 비트 파스타를 해줄 거라고 했다. 아내 역시 비트를 먹어본 적도, 비트 파스타란 걸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호응도 하지 못했다. 제발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를 바라는 얼굴이었다. 놀라지나 말라면서 호언장담을 하고 나는 요리를 진행했다.
프로그램 제목처럼 레시피는 초간단했다. 비트와 마늘, 고추, 올리브유, 소금, 레몬즙을 넣고 믹서기에 갈면 소스가 끝이다. 삶은 면을 버무리면 요리도 끝. 15분이면 족하다. 식탁에 올리기 전, 간을 볼 겸 맛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지, 대체 뭔 맛이 이런가 싶었다. 호언장담이 일구무언으로 변하기까지 15분이 채 안 걸렸다. 분명 레시피대로 했는데, 비트 특유의 흙 맛이 너무 강해서 먹기 부담스러웠다. 냄새를 없애려고 후추를 뿌렸는데 소용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소금을 더 넣었다가 간마저 짜게 되었다. 최악이었다.
면이 불면 먹지도 못할 것 같아서 식탁에 올렸다. 아내는 자줏빛 파스타를 발견하고 환상적이라며 환호하였지만, 환호가 침묵으로 변하기까진 불과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뭐 한두 가지인가 싶었지만, 이상하게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틈만 나면 비트 파스타를 시도했다. 물론 오직 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철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모에게 비트는 도움이 되는 식재료다. ‘땅속에 흐르는 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비트는 철분과 엽산, 비타민이 풍부하여 적혈구를 생성하고 혈액을 깨끗하게 하는 효능이 있으며, 붉은색의 베타인 색소는 항산화 작용을 하여 암을 예방하고 염증을 완화시켜준다는데, 이대로 포기하기엔 재료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관건은 비트 특유의 흙냄새를 잡는 것이었다. 비트 파스타는 검색해도 레시피가 나오지 않아 혼자서 이리 해보고 저리 해보면서 연구했다. 바질 페스토 파스타 하듯 갈은 비트를 팬에 넣어서 볶아보았는데 별로였다. 찜기에 찌면 비트의 흙냄새가 나아진다고 해서 해보았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 개수대에 실패가 쌓여갔다.
이렇게 맛없는 파스타를 아내에게 주느니, 다른 맛있는 음식에 정성을 쏟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만 포기하려는데, 웬일인지 아내가 나를 독려하였다. 비트 파스타의 어떤 점이 아쉽고 어떤 맛을 개선하면 좋을지 정확한 피드백을 주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일밖에 모르던 사람에게 취미가 생긴 게 좋아 보였던 걸까. 온종일 육아로 힘들어하는 내가 유일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이 좋았던 걸까. 맛이 있든 없든 매일 음식을 차리느라 땀 흘리는 남편이 고마워서 그랬던 걸까.
화학식을 풀지 못해 낑낑대는 학자처럼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간식으로 먹을 사과를 씻다가 나는 문득 떠올렸다. 사람들이 사과(apple), 비트(beet), 당근(carrot)을 갈아서 ABC주스라며 마신다는 것을! 유레카!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마지막이란 각오로 다시 부엌에 들어섰다.
우선 비트를 찜기에 쪘다. 이때, 껍질을 벗겨서 찌면 영양소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껍질 채 찌는 게 중요하다. 다 쪄진 비트의 껍질을 벗기고 3분의 2만 믹서기에 넣었다. 마늘 4개와 빨간 고추, 올리브유와 소금을 넣고, 새콤함을 살리기 위해 레몬즙을 평소보다 조금 더 넣었다. 여기에 사과 3분의 1쪽을 추가했더니, 맛이 확실히 달라졌다. 과일의 새콤달콤함이 비트의 흙냄새를 잡은 것이다. 더하여 체내 철분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 비타민 C가 풍부한 빨간 파프리카 반쪽도 추가했다. 맛을 보니 나쁘진 않은데, 감칠맛이 부족한 것 같았다. 계획엔 없었지만 불현듯 홀그레인 머스터드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한 스푼을 넣었더니, 맛의 공백을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완성한 소스에 삶은 면을 버무리고 새하얀 그릇에 담았다.
가니쉬로 뭘 할까 고민하다가 냉장고에 있던 깻잎을 활용했다. 유독 한국에서만 소비되는 깻잎(들깨도)은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걸로 알려져 있다. 철분 역시 많아서 콘셉트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색감과 향을 위해 레몬 제스트를 뿌려 요리를 완성했다.
어서 빨리 아내에게 먹이고 싶었지만 아내는 예전에 일했던 곳에 문서를 보낼 게 있다며 작업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 때문에 그런다는데 도리가 없었다. 나는 혼자서라도 맛있게 먹기로 했다.
면의 열기로 살짝 데워진 파스타를 소스를 듬뿍 묻혀 입에 넣었다. 비트의 아삭 거리는 식감이 면발과 어우러져 입 안에서 물결치듯 움직였다. 비트의 향은 과일의 새콤달콤함이 잡아주고, 과일의 단 맛은 마늘과 고추, 파프리카의 알싸함이 잡아줬다. 홀그레인 머스터드가 이 모든 맛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 어울리도록 도와줘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훌륭했다. 깻잎과 레몬 제스트도 비트의 향을 해치지 않고 적절하게 어울렸다. 괜찮았다. 내가 만든 게 아닌 것 같았다. 지난 실패의 여정이 떠올라 더 맛있게 느껴졌다.
셰프들은 자신의 요리에 이름을 붙이곤 하던데, 정성을 쏟은 이 요리에 나도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포카와 저녁 산책을 하는 동안 나는 고심하여 몇 개의 후보를 떠올려봤다.
1. 산모를 위한 철분 파스타
2. 아이언 파스타
3. 자우림(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
집에 돌아오니, 아내 앞에 비트 파스타의 텅 빈 그릇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아내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어떤 마법을 부렸냐면서 놀라워했다. 나는 비법을 말해주지 않고 잘난 척을 좀 했다. 아니, 꽤 많이 했다. 그러곤 파스타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데 한번 들어보라고 했다.
“어때?”
아내는 가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뭐랄까. 쉬웠으면 좋겠는데. 영어 이름 말고 한글이면 좋겠고.”
“한글 뭐가 좋을까? 철분 파스타? 피 건강 파스타?”
“그건 너무... 잠깐만.”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의견을 냈다.
“예를 들면, 그런 거 있잖아. 토토가 철들었네.”
아?!
어쩌면 내 계획대로 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가끔은 인생이 더 재밌는 게 아닐까. 그래. 계획에 없던 아이가 태어나며 마꼬 덕분에 내가 철들었지. 나는 아내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파스타 이름을 지었다.
이름하여, <철들었네, 파스타!>.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저는 빈혈을 예방하려면 철분 함유가 높은 채소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칼슘처럼 철분도 체내 흡수율이 중요하더라고요. 철분도 체내 흡수율만 따진다면 고기가 채소보다 높지만, 비타민 C를 곁들여 먹으면 채소만으로도 흡수율이 높아진다고 해요. 대부분의 채소에는 비타민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채소만 골고루 먹어도 철분 결핍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요.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에서 발간한 <제9 개정판 국가표준 식품성분표 II>(2016)를 보고 철분 함량이 높은 채소와 과일, 해조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봤어요. 아이들 이유식을 만들거나 비건 분들에게도 도움되실 것 같아서 공유해요. 수치는 100g 기준 mg를 표시한 거예요. 철분 많이 드시고 건강하셔요! :)
1) 곡류
귀리 오트밀 5.8 / 메밀국수 말린 것 2.54 / 맵쌀 발아현미 3.3 / 통밀 생 것 5.2 / 쌀보리 생 것 2.59 / 찰보리 생 것 3.37 / 차조 생 것 3.79 / 퀴노아 3.54
2) 두류
렌즈콩 7.17 / 병아리콩 4.74 / 완두콩 말린 것 5.8 / 쥐눈이콩 말린 것 8.14 / 대두 말린 것 6.66 / 서리태 말린 것 6.19 / 검정콩조림 28.2 / 두부 1.54 / 얼린 두부 7.5 / 검정 팥 7.3
3) 견과류
들깨 말린 것 7.74 / 아몬드 말린 것 4.76 / 잣 말린 것 15.9 / 참깨(흰) 말린 것 8.04 / 치아씨 말린 것 7.72
4) 채소류
가죽나물 말린 것 12.8 / 가지 말린 것 3.47 / 고구마잎 데친 것 3.38 / 고구마 줄기 말린 것 7.11 / 고수 생것 21.4 / 고춧잎 말린 것 31.61 / 냉이 생것 13.24/ 냉이 데친 것 9.74 / 들깻잎 1.91 / 들깻잎 장아찌 2.34 / 머위 말린 것 59.3 / 무청 생것 11.5 / 무말랭이 5.18 / 무말랭이 무침 18.1 / 부추 재래종 생 것 3.4 / 브로콜리 잎 삶아서 말린 것 3.9 / 비트 적비트 뿌리 생 것 5.9 / 상추 로메인 생 것 8.7 / 시금치 섬초 데친 것 3.45 / 쑥 생 것 8.14 / 쑥 말린 것 78.15 / 취나물 참취 5.99 / 케일 꽃 케일 생 것 3.3 / 토란대 줄기 말린 것 8.1 / 파슬리 생 것 1.5 / 호박잎 찐 것 2.62 / 애호박 말린 것 3.03
5) 버섯류
석이버섯 말린 것 222.83
6) 과일류
무화과 말린 것 2.02 / 산수유 말린 것 6.2 / 살구 말린 것 2.31 / 오미자 농축액 5.1 / 키위 골드 생 것 1.72 / 건포도 1.44
7) 해조류
돌김 말린 것 18.6 / 다시마 말린 것 6.3 / 매생이 생 것 18.3 / 매생이 말린 것 43.1 / 모자반 말린 것 67.3 / 미역 말린 것 9.1 / 미역튀각 11.75 / 청태 말린 것 320 / 톳 말린 것 76.2 / 파래 말린 것 17.2
8) 유지류
들기름 5.38 / 참기름 1.75
9) 조미료류
계피 가루 28.24 / 고춧가루 4.89 / 깨소금 볶은 것 19.0 / 나토 3.3 / 된장 양조 7.0 / 산초 가루 14.20 / 오래가노 말린 것 36.80 / 월계수 잎 말린 것 43.00/ 정향 가루 9.9 / 파슬리 말린 것 22.04 / 파프리카 가루 21.1 / 검은 후춧가루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