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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Oct 30. 2020

아이는 저절로 크지 않는다

소갈비찜


마꼬가 백일이 되자 엄마는 집으로 떡 상자를 보내왔다. 상자에 소복하니 하얀 백설기가 쌓여 있었다. 축하와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떡이라 했다. 옛 어른들은 백일 떡을 백 사람에게 나눠줘 아이의 백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까진 못하고 소소하게 이웃 몇몇에게 떡을 나누기로 했다. 낱개 별로 포장하고 손편지를 썼다. 백일 동안 아이가 많이 울었을 텐데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적었다.

마스크를 쓰고 마꼬와 함께 주택가인 이웃집을 돌며 떡을 나눴다. 꼬물꼬물 한 마꼬를 건너다보며 이웃들은 아이가 벌써 백 일이 되었냐며 축하해줬다. 우는 줄도 몰랐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는 원래 우는 거라며 신경 쓰지 말라는 이웃도 있었다. 아이 떡은 공짜로 먹으면 안 된다면서 한 어르신은 아내 손에 만 원을 꼭 쥐어주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며 마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어른이 된 후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순수한 환대와 포옹을 마꼬 덕분에 느꼈으니까.

백 일이 되기 하루 전엔 산후 조리원에서 알게 된 조리원 동기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제 엄마 태가 나는 여자 넷과 아직 아빠 태가 나지 않는 남자 둘, 사랑스러운 아이 넷이 모였다.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들이 꼬물거리면서 울고 웃고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다. 어른들은 아이를 챙기며 그간 육아 전선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나눴다.

우리 부부를 제외하곤 모두 독박 육아 중이라서 엄마들은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그리웠다고 했다. 밥 먹기도 어려워 얼려둔 미역국을 해동해서 대충 먹거나 그냥 굶는다고 했다. 두 엄마는 육아 스트레스 때문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서 단유를 한 지 오래였다. 그중 한 명은 육아휴직 두 달만에 출근했고, 다른 한 명은 육아휴직 후에 회사에서 복귀를 받아주지 않았다. 또 다른 엄마는 일 년후에 복귀를 할 예정이지만 담당업무가 사라져 복귀하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머지 한 명인 아내는 프리랜서라서 육아휴직 자체가 없었고, 대체할 만한 어떠한 정부지원도 받지 못했다. 남자들 중에 육아휴직을 계획 중이거나 쓴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대부분의 회사가 여전히 육아휴직을 쓰면 매장당하는 분위기였다. 쓰고 싶어도 정부 지원금이 적어서 신청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니, 여자들은 잠시라도 회사와 육아와 살림을 피해 산후조리원으로 피신을 갔다가, 몸이 다 풀리기도 전인 2-3주 차에 집으로 돌아가 독박 육아를 시작했다. 사회가 개별 가정에 떠넘긴 육아를 여자 혼자 떠맡으면서도 혹시나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닐지, 스트레스로 모유가 나오지 않는 젖가슴을 붙잡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돌봄 노동, 그림자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산후 우울증을 겪거나 경력단절을 경험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남자들이 단지 육아휴직을 못하기 때문일까.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생활시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자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3시간 13분으로 5년 전보다 12분 감소했다. 남자의 가사 노동시간은 단 56분. 그것도 5년 전보다 10분 증가한 숫자다. 심지어 여성이 일을 하고 남성이 무직인 경우에도 여성이 가사 일을 한 시간이 더 많았다. 가사노동이 이 정도인데 여기에 육아를 더해 조사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성별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인식과 세태가 변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 성평등이 화두가 된 이 시대에 난공불락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살림과 육아의 영역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아이가 귀해졌다면서 세상은 아이들을 환대한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세상은 마치 아이들이 저절로 크길 원하는 것 같았다. 남편도 기업도 사회도 여성의 독박 육아가 아니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걸 분명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상황인지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묵인하는 건 아닐까. 여자 혼자만 참고 조용하면 되니까. 그러면 육아하는 여자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해지니까.

우리 부부는 한 사람의 희생 말고 육아의 성평등을 선택했다. 공동육아를 하고 살림을 나눠서 했다. 아내가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 나는 아내를 위한 식탁을 차렸다. 그렇게 꼬박 백 일을 보냈다.




백 일이 됐으니, 이제 아내의 산후조리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마지막 요리로 나는 소갈비찜을 택했다. 특별한 날이면 어김없이 아내가 해줬던 소갈비찜을 이번엔 내가 아내에게 대접하고 싶었다. 시장에서 큰 맘먹고 튼실한 소갈비를 사서 집에 돌아오는데 아내가 물었다.

“내가 해줄까? 내가 해줄게.”
아내는 본인이 묻고 본인이 대답했다. 나는 뒤늦게 좋다고 말했다.

마꼬를 재운 다음, 아내는 오랜만에 부엌에 들어가 팔을 걷어붙였다. 미리 찬물에 3시간 동안 담가서 핏물을 뺀 소갈비에 칼집을 냈다. 그다음 소갈비를 뜨거운 물에 데쳐서 지방을 제거했다. 그동안 아내는 양념장을 준비했다. 진간장에 물과 다진 마늘, 다진 파를 넣고 설탕과 함께 사과를 갈아 넣었다. 바로 끓일 줄 알았는데 아내는 보관용기에 고기와 양념장을 붓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자 아내는 일단 자자고 했다.

다음날, 아내는 양념이 충분히 밴 고기를 보며 뿌듯해했다. 이젠 조리만 하면 된다고 했다. 우선 냄비에 고기와 양념장을 넣고 끓였다. 둥둥 뜬 기름은 건져냈다. 그동안 당근, 양파, 버섯, 고추, 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고기가 익어가는 정도에 따라 순서대로 채소를 넣었다. 모든 재료가 뭉근하게 푹 익으면 소갈비찜 완성이다.

내가 마꼬와 노는 동안 아내는 ‘남편을 위한 식탁’을 차렸다. 다른 반찬 낼 것 없이 갈비찜과 김치만 올려놓고 밥을 먹었다. 고기가 잘 익어서 입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간이 제대로 배어서 씹을수록 고소하니 맛있었다. 양념을 흡수한 당면과 채소를 건져 밥과 함께 먹었다.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는 그동안 고마웠다면서 많이 먹으라고 했다. 어른들 말이 맞았다.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었다.

우리는 금방 밥 한 그릇을 비워냈다. 예전처럼 요리를 해준 아내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우리가 함께한 백일 간의 식사와 부엌에서 허둥대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아내와 내가 코로나 19 상황에서 출산과 육아, 모유 수유를 하며 고생했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아이 기저귀를 갈다가 오줌 세례를 얼굴로 받고, 모유 수유를 하며 할퀴는 아이의 손톱을 참아내고, 새벽에 분유를 먹이다가 너무 졸려서 젖병을 아이 코에 물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고, 코로나가 무서워 아이를 꽁꽁 싸매고 예방접종을 맞으러 갔던 날들, 말하자면 끝도 없는 그 장면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모든 장면들은 부모가 된 우리에게 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이는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부모가 있는 힘껏 사랑해줘야 아이는 비로소 자란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는 모유 수유를 하는 아내에게 다가갔다. 마꼬는 엄마의 가슴을 있는 힘껏 빨고 있었다. 하도 열심히 빨아서 코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것이 빨갛고 연약한 엄마의 청춘인 줄도 모르고 마꼬는 겁도 없이 베어 먹었다. 우리는 우리의 청춘이 베어나가도 상관없다는 듯 마꼬를 보며 웃었다. 뭐가 좋은지 작은 보조개가 보이도록 마꼬도 따라 웃었다. 포카도 다가와 우리의 턱을 핥고 꼬리를 말고 곁에 누웠다. 나는 아내에게 그간 고생했다며 볼에 뽀뽀를 했다. 포카도 동생 돌보느라 고생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우리는 우리가 기특해서 서로를 토닥였다. 마꼬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를 하며 우리 네 식구는 백 일을 축하했다.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핏물을 뺄 시간이 없다면 뜨거운 물로 고기를 데칠 때, 소갈비 속까지 핏물이 익도록 오래 끓여주면 된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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