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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Oct 22. 2020

세종대왕이 바랐던 육아휴직

육개장


가끔은 세상이 대놓고 남자들의 육아 참여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인을 은밀하게 보내는 걸까. 도대체가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가 없다. 휴게소, 공원, 놀이터, 마트 등 심지어 정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건물에도 없다. 뿐이랴. 수유실은 남자 출입이 불가하다는 안내문구까지 붙여있다. 얼마나 이상한 놈들이 많았으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세상에 남자 혼자 혹은 남자 둘이서 아이를 돌보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은 마음이 어떨까 싶었다. 저깟 공중화장실 때문에 남자들이 아이를 키울 권리를 박탈당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눈에 띌 때마다 불편신고 접수를 했다.

공공시설보다 불편한 건 언제나 공공의 시선이었다. 아내가 일하러 간 사이 마꼬를 품에 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쳐다봤다. 평일 오후, 놀이터, 공원, 소아과 병원, 재래시장에 갈 때면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원체 남들 시선 신경 안 쓰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시선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이마에 ‘육아휴직 중’이라고 붙여놓을 수도 없고, 이거 참.

그 시선이 회사에서라고 다를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여전히 휴직을 사용하기 어려운 분위기란다. 승진을 포기하거나, 좌천이나 퇴직하기 전에 하는 게 남성 육아휴직이라고 한다. 남자가 육아에 참여하는 게 왜 밑 보일 일일까. 없는 법을 재정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법과 제도를 사용하겠다는데, 왜 대체 그런 눈으로 보시는지.

원래 우리는 이런 민족인가 싶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세종 대왕 때 이미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관비가 출산 후 일주일 만에 복귀해야 했던 제도를 세종 대왕은 세 번에 걸쳐 개정하였다. 산후 휴가를 7일에서 100일로 늘리고(1426년), 출산 한 달 전 관비의 업무를 면제하는 산전휴가 30일(1430년)을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관비의 남편에게도 한 달의 육아휴직(1434년)을 주었다. 아이뿐 아니라 아내를 보살피라는 차원에서 세종 대왕은 남성 출산휴가 제도를 개설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에선 1430년대를 기점으로 200년 간 마녀사냥이라는 여성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 역시 여성의 지위가 낮았다는 시대상을 고려하면,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훨씬 앞서 간 정책이었다. 600여 년 전에 무려 공동 육아라니, 우리가 그런 민족이었다니!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떨까. 2007년 육아휴직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만 해도 남성 육아휴직은 2%에 그쳤다. 지지부진하던 이용률이 조금씩 증가하더니 2020년 상반기 휴직자 비율이 치솟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남성 육아휴직자가 1만 4857명으로 전체 육아휴직자 가운데 24.7%에 이르렀다. 육아휴직자 4명 중 1명이 남성으로 놀랍게도 전년 같은 기간 대비 34.1%가 증가했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코로나 19로 인해 아이들을 교육시설에 맡길 수 없게 되며 남성 육아휴직자가 늘어난 것으로 파악했다. 우습게도 코로나가 남성 육아휴직을 부추긴 셈이 되었다.

하지만 사용자의 대부분이 공무원과 대기업, 300인 이상의 기업 종사자라는 점은 한계다. 그만큼 육아휴직은 경제적 타격이 크다. 지난해, 유니세프가 발간한 <가족친화정책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남성 육아휴직자의 소득대체율이 32.8%로 휴직 동안 임금의 3분의 1로 생활해야 한다. 노르웨이(97.9%), 오스트리아(80%)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단순히 정부지원금이 낮다고 투덜대는 게 아니다. 지원금은 여성의 산후 우울증, 경력단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성의 독박 육아와 산후 우울증을 해결하려면 남성의 공동육아가 이뤄져야 하는데, 현재 제도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해도 지금 같은 정부 지원금 수준이라면 공동육아는 그림에 떡이기 때문이다. 맞벌이는 그래도 고민이라도 할 수 있지만 외벌이 경우는 육아휴직을 꿈도 꾸지 못한다. 직업이 없거나 취업준비생, 학생에게도 정부 지원금을 주는 스웨덴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여성의 경력단절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지원금이 지금보다 나아지면 남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하여 여성의 사회 복귀가 활발해질 것이고 육아의 성평등이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지원금으로는 남성이 육아휴직을 선뜻 내기가 망설여진다. 한국은 통계적으로 여성이 받는 임금이 남성보다 37% 낮기 때문에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면 가계 경제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적금도 다 깨고 여차하면 퇴직금도 깰 각오로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니 육아가 지옥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게 아닐까. 지옥은 부모 개개인의 마음에 있는 게 아니라 통장에 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지옥은 법과 제도에 있다. 지옥 속에서 자라야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면 제도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세종대왕이 작금의 시대를 보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출산율이 1%도 안 되고, 육아가 지옥이라는 백성들의 한탄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나는 그만 헛된 질문은 그만두고 도마 위에 있는 고사리와 대파를 자르기 시작했다. 세종대왕이 아내를 보살피라는 차원에서 남성의 출산휴가 제도를 마련한 것처럼 나는 아내를 위해 오늘도 산후조리 식탁을 차렸다. 아내가 좋아하는 고사리를 마구 넣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보양식인 육개장을 끓여봤다.

일단 소고기 양지를 찬 물에 30분 정도 담가서 핏물을 빼고 미리 준비한 다시마 육수에 30-40분 삶았다. 그동안 숙주를 데쳐서 찬물에 식혀놓고, 대파와 고사리도 다듬었다. 육개장에서 중요한 건 모든 재료에 밑간을 하는 거라고 유튜브에서 배웠다. 볼에 숙주와 대파, 고사리를 넣고 국간장과 다진 마늘, 고춧가루를 넣어서 밑간을 했다. 30-40분이 지나 육수는 잠시 보관해두고 잘 삶아진 양지를 꺼내서 칼로 썰었다. 마찬가지로 고기에 국간장과 다진 마늘, 고춧가루로 밑간을 하여 재료 준비를 마쳤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넣어 기름에 향이 배일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넣어 고추기름을 만들고 타기 전에 미리 밑간 해둔 채소들을 볶았다. 숨이 한 김 죽으면 육수와 소고기를 넣고 혹시 모를 누린내를 위해 다진 생강도 손톱만큼 넣어주었다. 맛을 보고 소금 간을 하면 되는데, 산후조리 용이라서 싱겁게 간을 했다. 이제 모든 재료가 뭉근하게 익을 때까지 끓이면 끝이다.

다시마 육수에 소고기와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육개장 국물은 맛이 깊고 풍부했다. 특히 고사리 특유의 구수한 맛이 소고기와 잘 어울렸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맛은 시원하고 아삭 거리는 숙주가 잡아줬고 대파의 향이 고기 누린내를 없애고 전체적으로 육개장의 풍미를 살려줬다. 환절기 감기 기운이 똑 떨어지도록 아내와 나는 땀을 빼며 육개장을 먹었다. 조선 시대에도 보신을 목적으로 육개장을 먹었다지, 아마. 그땐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지만, 혹시 누가 알랴. 출산하고 기운 없는 아내에게 육개장을 끓여준, 시대를 앞서 간 페미니스트 남편이 있었을지도. 사극 드라마 같은 전개를 상상하며 나는 그 인물에 기묘한 연대감을 느꼈다.

다음날, 나는 또 마꼬를 안고 이리저리 빨빨 돌아다니며 세상 구경을 시켜줬다. 천변에서 어미와 새끼 오리들이 일광욕을 하며 뒤뚱거렸고, 바람에 말갛게 씻긴 나뭇잎들이 소녀들의 귀걸이처럼 반짝거렸다. 평일 오후, 한낱 평화로운 이 세상이 지옥일 리가 없었다. 아내를 보살피고 아이를 돌보는 지금 내 모습이 세종 대왕이 바랐던 육아휴직이 아니었을까.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세상의 풍경을 나는 아이와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조선시대에도 먹었던 육개장은 고기를 결대로 찢어서 얇은 고기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데요. 제 입맛에는 영 맞지 않더라고요. 고기를 결대로 찢으면 씹기가 질기고 뻑뻑해져서요. 저는 스테이크처럼 결과 다른 방향(직각)으로 깍둑썰기 해서 먹었어요.


-육개장은 고추기름이 적절히 나와야 맛있는데요. 주의하지 않으면 고춧가루는 기름에 금방 타요. 약불에서 젓다가 채소를 바로 넣어서 고춧가루가 타지 않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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