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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Aug 23. 2020

그날의 풍경을 너의 이름으로 지었다

강된장과 호박잎 쌈


아이가 생기기도 전에 나는 아이 이름을 지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없는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는 건 한 줄도 쓰이지 않은 소설의 제목을 짓는 것처럼 묘하게 설레었다. 그것은 작년 봄의 일이었다. 부서를 이동하고 적응하지 못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심난했던 시절이었다. 지방으로 출장을 가야 했는데, 자칫 기차 출발 시간을 놓칠까 봐 동료와 함께 택시를 탔다. 출장 준비도 제대로 못한 마당에 기차까지 놓치면 어쩌나 싶어서 마음이 졸였다. 그때 동료가 창 너머로 반짝이는 한강을 감탄해하며 말했다.

“윤슬이네요.”
“그게 뭔데요?”

동료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반짝이는 거요. 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한글로 윤슬이라고 해요.”

웬일인지 나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빛 물결을 보고 있으니, 내 불안한 마음과 영혼이 전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윤슬’이란 단어를 잊지 않으려고 습관처럼 메모장을 열었다. '윤슬'이라고만 적으려다가, 단어 앞에 내 성인 ‘주’를 붙였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이 이름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성과 아내의 성인 '윤'으로 시작하는 이름이라니, 생각만 해도 로맨틱했다.

그로부터 100일이 지난 어느 날, 첫 문장처럼 아이가 생겼다. 뱃속 아이가 아프지 않고 5개월을 무사히 넘기자, 나는 아내에게 연애편지를 건네듯 아이의 이름을 말했다. ‘빛의 물결’이라는 단어의 뜻과 그날의 광경과 부부의 성이 들어간 아이의 이름을 아내는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그 후로 우리는 뱃속 아이에게 종종 “슬이야”라고 불렀다. 아이도 자신의 이름을 좋아해 주길 바라면서.


올해 3월 초, 아이는 봄의 시작을 알리듯 세상에 태어났다. 반짝이던 그 날의 풍경을 까만 두 눈에 가득 담고서. 그 신비로운 눈을 우리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슬이야. 아빠. 여긴 엄마.”
“슬이야. 엄마. 아빠. 너의 이름은 윤슬이야.”




우리 부부는 이미 이름을 결정했지만 한 가지 난관이 있었다. 형이 미혼이라, 어쩌다 보니 마꼬가 장손이 되어버린 까닭에 부모님이 아이 이름에 ‘항렬자(돌림자)’가 들어가도록 ‘은근한’ 요구를 하였던 것이다. 이에 우리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항렬은 단지 돌림자를 쓰는 게 아니라 동족의 종속을 의미한다. 우리 아이는 대를 잇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내가 힘들게 낳은 아이를 내 동족의 항렬만 따르게 하는 걸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 아이 이름은 이미 정했으니, 항렬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의외로 아버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하였다. 본인도 너희 이름 지을 때 항렬자를 따르지 않았다면서. 아버지는 손주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들어 보자고 했지만 나는 알려드리지 않았다. 출산일이 다가와도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엄마가 왜 안 알려주는 거냐며 타박했지만 나는 그저 아이가 태어나면 알려드리겠다며 똥고집을 부렸다.

내 마음은 이랬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평가’ 받고 싶지 않았다. 미리 알려드리면 수정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부모님이 아이 이름을 평가하고 다른 것들과 비교할 것 같았다. 마치 견적서를 비교하고 최종 시안을 컨펌받는 것처럼 아이 이름을 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 이름은 누구의 평가도 받지 않고, 부모인 우리가 지은 대로 정하고 싶었다.

이름을 알려드리지 않자 몸이 달은 엄마는 자꾸만 작명소에 가려고 했다. 엄마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절대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작명소가 지어주는 이름들에 애정이 가지 않았다(내 이름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80년대 생들은 대부분 한자로 구성된 이름을 썼다. 크고, 중요하고, 빼어나고, 아름답고, 선하고, 맑고, 빛나는 뜻을 품고 있는 또래 세대의 이름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종종 질식할 것 같았다. 사람은 무엇이 되기 위해서 태어나는 게 아닌데, 그 이름들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아무나 돼.

-Jtbc <한끼줍쇼> 이효리 씨 편에서


동족의 항렬도, 사회가 바라는 바를 지어주는 작명소도 우리 부부는 원치 않았다. 아무 박력도 없는, 부모의 기대와 의도가 들어가지 않는 이름을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존재 자체로 반짝이는 아이에게 세상을 위해 반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처럼 반짝일 필요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반짝일 필요도 없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될 필요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아이가 태어난 다음날, 나는 출생신고를 하고 부모님께 아이 이름과 뜻을 알려 드렸다. 나와 아내의 성을 함께 넣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그간 답답해했지만 부모님은 유별난 나의 행동과 의도를 이해해주었다. 다행히 손주 이름도 예뻐하며 귀하게 여겼다. 두 분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손주 이름을 자꾸만 입으로 되내었다. 부르면 부를수록 생명에 온기가 불어넣어지듯 이름이 점점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욕조 물을 받아 마꼬를 씻겼다. 오리 모양의 장난감을 보여주니 마꼬가 배시시 웃었다. 아내가 마꼬에게 수유를 하는 동안 나는 재래시장에서 사 온 재료들로 식탁을 차렸다. 계란찜을 불 위에 올리고, 마를 구워 꿀에 조렸다. 깨끗이 씻은 호박잎을 찌고, 우렁을 넣은 강된장을 만들었다.


향신채인 마늘과 양파를 잘게 썰어 들기름에 달달 볶았다. 양파가 투명해지면 새송이 버섯과 파의 하얀 부분을 넣어 볶다가 밀가루로 치대서 깨끗이 씻은 우렁도 집어넣었다. 그다음엔 된장을 넣었다. 강된장에는 기호에 따라 고추장도 넣는데, 나는 된장과 고추장을 3:1 비율로 잡았다. 채소에서 나온 수분이 날아가고 된장과 고추장의 농도가 뻑뻑하게 될 즈음에 따로 준비한 멸치 다시마 육수를 재료가 자작하게 잠길 정도로 부었다. 마지막에 풋고추를 넣고 타지 않도록 휘휘 저어주며 강된장을 되직하게 졸이면 완성이다.

호박잎에 밥 한 숟가락과 강된장을 푹 넣어서 쌈을 만들어 먹었다. 까끌하면서도 보들보들한 호박잎과 구수하게 볶아진 강된장과 채소들이 쫄깃한 우렁이를 만나 입 안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소박한 재료들로 만든 이 음식은 어쩜 이리도 맛있을까. 우리는 발우 공양하듯 밥을 깨끗이 비워냈다.

후식으로 살구를 먹으며 아내는 문득 나중에 마꼬의 목소리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해졌다. 어떤 목소리와 억양으로 말할까. 우리가 지은 이름을 좋아해 줄까. 이 아이는 대체 어떻게 자랄까. 우리는 뭐가 돼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근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사한 목소리로 “아빠, 밥 주세요.”라고 말하는 마꼬를 상상하며 우리는 배시시 웃었다. 이유식을 할 때가 된 건지 마꼬가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저처럼 하면 곤란해져요!
-강된장은 국물을 조그만 넣고 졸여야 해요. 저는 된장찌개처럼 국물을 많이 넣었다가 한 세월을 졸이는데 시간을 보냈어요.

-보통 된장찌개는 육수를 만든 다음, 그 안에 채소를 넣고 된장을 풀어주는데요. 강된장은 채소와 된장을 볶은 다음 육수를 넣어줬어요. 그러면 된장(콩)의 단백질이 불에 의해 볶아지면서 더 구수한 맛이 나더라고요. 된장찌개 끓일 때도 이런 순서로 하면 더 구수하고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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