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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또 속았어요, 그래서 작심 메리 크리스마스

기다리는 날 만큼 오늘도 행복해야 해요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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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몇 시간 안 남았네요. 이렇다니까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늘 그렇듯이요.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여기는 태국 방콕이니 더 실감 못하는 걸 수도요. 코로나로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데, 어딘들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겠어요? 크리스마스만 그런가요? 봄소풍은요? 방학은요? 별 거 없었죠? 어릴 때 일기예보에서 비라도 온다고 하면, 잠이 오던가요? 실제로 비가 와서 교실에서 김밥을 먹은 적도 있어요. 아홉 살 저에겐 충격적인 비극이었죠. 쨍쨍한 날에 그럼 한 번 다 갔어야죠. 언제 학교가 그렇게 자비로운 적이 있었던가요? 기다림은 늘 기다림이 무의미하다는 걸 가르쳐 줘요. 신기하죠? 그런 배움을 수백 번 반복하는데도, 보고 싶은 것만 봐요. 이유요? 행복해지고 싶으니까요. 크리스마스는 별 거 없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살아서 얻는 건 또 뭘까요?


어제는 그렇게 벼르던 인도 음식점에 다녀왔어요. 차가 막혀서 한 시간이나 걸렸어요. 맛있기는 했지만, 작심하고 갈 정도는 아니더라고요. 허겁지겁 먹어서인지 트림은 어찌나 나오던지요. 한국 뉴스는 가끔 안 보고 싶어요. 특히 정치 뉴스요. 그래도 봐야죠. 정치는 힐링하려고 보는 거 아니니까요. 정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왜냐고요?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저 비겁한 사람 맞아요. 댓글에 일일이 반박하며 싸이버 전사되고 싶지 않아요. 크리스마스잖아요.


한국의 소식은 심난하고, 몸은 찌뿌둥해요. 보다 만 영화가 삼십 분 남았다는 게, 오늘의 가장 기쁜 일이 됐어요. 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굳이 그걸 오늘 고민해요. 우리가 기다리는 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크리스마스처럼요. 봄 소품처럼요. 되돌아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던 날이 봄소풍 아니었나요? 학교 안 가는 기쁨이요? 학교에서는 뭐 늘 괴로웠나요? 선택적 기억 조작의 산물일 뿐이죠. 억대 빚을 지고 찜질방에서 자며 대리운전까지 하던 한 남자가 기억나요. TV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큰 빚을 고생고생 다 갚고 얼마 후에 죽었대요. 병으로요. 머릿속은 빚을 갚고 나서의 계획으로 가득했겠죠. 자신을 돌 볼 틈이 어디 있었겠어요? 일단 빚부터 갚고 보자. 그 날만 간절히 기다렸겠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드디어 왔어요. 그리고 죽었어요. 참 잔인한 게요. 비극적 결말을 안다고 해도, 빚은 갚아야 한다는 거예요. 대신 최대한 천천히 갚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겠죠. 한 끼라도 더 좋은 걸 먹으려고 했겠죠. 견디는 날로만 채우면 안 된다는 걸 명심했겠죠.


크리스마스만 기다리면서 나머지를 '버리는 날'로 쓰면 안 돼요. 11월이 특히 그렇죠. 11월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요. 휴일도 없고, 떠오르는 즐거움이 전혀 없는 달이죠. 11월을 12월을 기다리는 달로 쓰면서 평생 살았어요. 12월 26일은 또 12월 31일을, 1월 1일을 기다리는 날로 쓰겠죠. 2020년 마지막 날이 오면요? 별 거 없다는 걸 또 확인하겠죠.


누구라도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있을 거예요. 주택 융자 빚을 완납한다든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다든가요. 하지만 그 꿈을 이루고, 다음 날에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노력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작은 행복을 챙겨야 해요. 정말 한 달 후에 죽어도, 덜 억울해야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다는 순대를 주문하고, 버건디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일 년에 한 번은 명품 구두도 사보는 거죠. 나에게 해줄 선물을 매일 고민하면서 살아야 해요. 여기는 방콕이라 끝내주는 순대는 없어요. 대신 망고가 있으니까요. 망고스틴이 있으니까요. 저는 저대로 열심히 행복 줍줍을 해볼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서 확실히 잘 생겨진 것 같아요. 제 글은 미용 목적입니다. 일종의 시술이라고 해두죠.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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