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는 대운하 빼고는 아는 게 없었어요. 거쳐가는 나라 정도로 생각했죠. 여유와 부티가 느껴져서 깜짝 놀랐어요. 숙소 건너편 중국 식당에서 다진 돼지고기와 채 썬 오이가 올라가는 국수를 팔았어요. 익숙한 듯, 새로운 맛에 환장해서 매일 갔던 기억이 나요. 백화점 앞에서 관악단이 연주하던 모습도 떠올라요.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였죠.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브라스 밴드에서 나오는 캐럴을 들었어요. 눈이 없고, 입김도 나지 않는 세상에서 크리스마스라뇨? 바다의 짠 냄새와, 습한 날씨와 경쾌한 재즈가 울려 퍼지는 백화점 앞이었어요. 생은 익숙한 것들의 반복인 줄만 알았어요. 변화는 기다린다고 오지 않아요. 내가 그곳으로 가면 돼요. 간단하지만, 참 어려운 진리를 몸으로 깨달은 날이었죠.
2. 디즈니 만화, 아기 사슴 밤비
배경은 미아리 구멍가게예요. 근대화 근 연쇄점 가맹점인데, 다른 가게와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가게 안 쪽방에서 신앙촌 담요를 돌돌 만 아이는, 흑백 TV로 디즈니 만화를 봐요. 아기 사슴 밤비를 뚫어져라 보고 있어요. 아랫목에서는 아침에 먹을 밥공기들이 이불로 덮여 있고요. 전 늘 그렇듯 또 오줌을 쌌어요. 축축하고, 낙이 없는 삶이에요. 어린아이는 가혹한 이 시간이 외롭기만 해요. 두부를 팔고, 달걀을 팔고, 콩나물을 팔고, 진주햄 소시지를 파는 엄마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방에 들어와서 저를 꼭 안아 줘요. 아, 또 들켰다. 오줌으로 축축한 쌍방울 내복에 어머니의 목장갑이 닿아요. 목장갑 감촉으로는 오줌이 감지가 안 되나 봐요. 나는 구원받았어요. 사랑하는 내 새끼. 뺨을 비비는 어머니, 아 어머니. 매를 들지 않는 어머니. 꽁꽁 언 바깥세상은 넘볼 수 없는 아늑함. 세상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희망은 이런 거야. 의심스럽기만 한 그 정의를 아주 약간은 이해하게 돼요.
3. 성당, 공연, 그리고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
중고등학교 때는 성당을 열심히 다녔어요. 대학교 1학년 때는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까지 했죠. 크리스마스는 가장 중요한 날이었어요. 학년별로 장기 자랑이나 연극을 했는데, 연중 가장 큰 행사였죠. 제가 맡은 학년은 연극 공연이었어요. 제가 무대 뒤에서 더빙을 하는 특이한 공연이었어요. 뭐라도 하고 싶었던 끼 많은 선생님이었던 거죠. 무대 뒤에서 아이들 동선 봐 가면서 열심히 대사를 치는데, 폴란드 신부님이 산타 복장으로 옆에서 대기 중이었어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산타가 무대로 등장해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이벤트였거든요. 폴란드 신부님이 마이크 꼭 쥐고 조잘대는 제 볼을 주욱 잡아당기시더군요. 신부님에겐 스무 살도 애죠. 뭐라도 해보겠다고 열심인 청년이 귀여워 보였나 봐요. 실수하면 안 된다. 긴장감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가끔 그 장면이 떠올라요.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가 등장하자마자 질러대던 아이들의 비명 소리까지 함께요.
4. 나에게 캐럴은 라스트 크리스마스 Last Christmas
영국의 남성 듀오 왬(Wham)이 Wake me up before you go go란 노래를 들고 나왔을 때, 얼마나 좋아했나 몰라요. 그런 말랑말랑한 노래는 그때가 끝이었어요. 조지마이클만 따로 나와서 Faith라는 어마어마한 곡을 내긴 했지만, 중학생 막귀에는 어렵게만 들리더라고요. Last christmas도 확 빨아들이는 느낌은 없었어요. 이렇게 잔잔한 노래는 어른들용이구나. 취향에 안 맞는 건 그냥 외우는 것. 남들 좋아하니까, 좋은가 보다 했어요. 이젠 이 노래를 들어야, 크리스마스가 왔구나. 실감하게 돼요. 조지 마이클은 누구보다 성공했지만, 대중에게 끌려다니는 뮤지션은 아니었죠. 그의 곡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나이를 먹어가는 저는 점점 더 그의 노래에 빠져 들어요. 이제 조지 마이클은 세상에 없어요. 슬프죠. 그런데 이 세상에 없는 게 어울려요. 이 세상이 소화할 수 없는 천재가 아니었을까요?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이젠 너무 쉬운 곡이 됐어요. 뻔하기까지 하죠. 어린 저를 홀리지 못한 노래는, 늙은 저를 평생 따라다니는 캐럴이 됐어요.
5. 다시 미아리, 구멍가게
아버지는 타짜셨어요. 결정적 순간에만 실력 발휘를 못 하셨죠. 집까지 날린 전적이 있으니, 어머니가 호랑이가 될 수밖에요. '하우스' 위치는 비원 옆 서울 우유 대리점이었어요. 서울우유 배달부들은 밤새 그곳에서 고스톱을 쳤죠.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당연히 판을 벌려야죠. 크리스마스 날에는 쉬니까요. 어머니가 잠이 오겠어요? 형의 손을 잡고 8번 버스를 타요. 저는 지난번에 다녀왔거든요. 대리점에 있는 초코 우유도, 아이스크림도 다 내 거가 되는 날이기도 했죠. 어머니 속이 타들어가건 말건, 아저씨들에게 500원 지폐를 받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어요. 가게 문은 닫히고, 저만 홀로 남아서 TV에서 흘러나오는 흑백 영화를 봐요. 쥐새끼일 수도 있고, 귀신일 수도 있는 소리에 오들오들 떨어가며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이란 영화를 그때 봤던가요? 차력사 잠파노와 멍청한 여자 젤 소미나의 이야기예요. 사랑받지 못하면서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멍청한 여자 젤소미나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죠. 잠파노는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흘려요. 여섯 살 제가 이해를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그래도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봐요. 홀로 구멍가게에 갇힌 한 아이가 젤 소미나와 얼마나 다르겠어요? 평범한 행복은 그냥 오지 않는다.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평범한 집의 크리스마스가 까마득해서, 아이는 울어요.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요. 크리스마스라고 겨울바람이 살살 불지도 않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옳은 삶은 없어요. 맞는 삶만 있을 뿐이죠. 내게 맞는 삶을 고민하며 살아요. 지금은 글을 쓰지만 언젠가는 춤을 추고, 언젠가는 김치를 담가서 태국 시골에서 백반을 파는 삶을 꿈꿔요. 언젠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