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만 커리, 음식물 쓰레기가 된 날

요리 천재, 커리를 망치다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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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도움으로 감바스, 샐러드 완성. 어엿한 상이 됐다. 오른쪽은 망친 마사만 커리

나는 약간 흥분상태였다. 효진이에게 마사만 커리를 먹여주겠어. 굳이 이태원까지 가서 마사만 커리 페이스트를 샀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제때 안 올 수 있다. 압구정동 정화 누나 아파트에서 나는 팔을 걷어붙였다. 6천만 원 들여서 개조한 32평 형 아파트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깨끗했다. 와인냉장고, 빌트인 오븐, 스위스 커피 머신, 번쩍번쩍 인덕션 레인지. 여유 있는 집이다. 내가 모르는 삶, 그래서 작은 여행. 냄비 하나도 묵직하고 두껍다. 타지도, 눌어붙지도 않는 독일제 냄비까지... 마켓 컬리에서 누나가 주문한 고구마는 유기농이고, 없어 못 파는 연하디 연한 생닭도 제때 도착했다. 효진이는 무슨 복을 타고 난 거야? 가장 완벽한 마사만 커리가 나오겠어. 오다가 갤러리아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 서울 우유 하나를 산다. 생닭의 잡내를 없애려면 우유가 필요하다. 내가 갤러리아 백화점 식품관에서 우유를 사다니. 카드를 내밀 때 약간 조마조마. 조마조마한 나에게 약간의 모멸감을 느낀다.


-껍질도 넣어야 해?


아니, 닭고기에서 껍질에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해? 누나의 취향에 동의할 수 없다. 껍질을 하나씩 벗긴다. 오늘은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효진이가 왔대


요리를 하다가 누나와 나는 서둘러 나간다. 아파트 복도 끝에서 효진이와 아버지가 보인다. 아버지는 누나에게 효진이를 맡기고 서둘러 사라지신다. 인사도 못했다. 누나가 효진이 휠체어를 조심스럽게 민다. 현관문이 닫힐까 봐 나는 문 앞을 지킨다.


-오빠 신발만 좀 치워주세요.


현관 구두와 신발을 치운다. 효진이의 가벼운 몸은 휠체어와 함께 사뿐히 들어온다. 잠실에서 압구정동까지, 효진이에겐 만만치 않은 거리다. 1시 약속이다. 1시 전에 왔다. 롯데월드에서 만날 때도 효진이는 30분 먼저 와 있었다. 효진이는 눈뜨자마자 종일 오늘의 1시만 생각했다.


마사만 커리에서 쓴맛이 난다. 내 몸이 안 좋은 건가? 누나, 좀 먹어 봐요. 맛이 써.


-너무 써. 쓴 맛만 빼면 완벽한데


보통은 인터넷으로 대용량 마사만 페이스트를 산다. 이태원에선 다른 걸 샀다.


-오빠 난 괜찮은데. 비염 때문에 맛을 잘 못 느끼는 건가?


맛을 잘 느끼는 나와 정화 누나는 먹을 수 없다고 결론 냈다. 폐기처분. 교촌치킨에서 간장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을 주문한다. 이때부터 나는 약간 백지상태가 된다. 마사만 페이스트를 잘못 산 걸까? 다른 이유가 또 있나? 효진이는 여행이 어려운 몸이 됐다. 이태원까지 굳이 간 이유다. 효진이에게 오늘은 여행이 되어야 한다. 가장 맛있는 여행. 약간 허탈하고, 약간 참담하다. 굉장히 화가 나진 않는다. 효진이나 정화 누나나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크겠지. 뻔뻔한 분석으로, 자책을 멈춘다. 그래도 약간의 공황상태가 된다.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주방을 치우는 누나를 대충 돕는다. 한가득 마사만 커리는 음식물 쓰레기. 누나는 닭의 살과 뼈를 분리한다. 마사만 커리는 없고, 일만 산더미. 효진이는 나를 위해 6년 근 홍삼 앰플을, 누나를 위해선 넬리(Nellie's) 세제를 사 왔다. 넬리는 처음 보는 물건인데 캐나다 천연 세탁 세제라고 한다. 효진이는 오늘을 위해 하루가 아닌, 일주일, 아니 그 이상을 썼다.


-응, 아빠, 네, 데리러 오세요.


일본에서 온 놀라운 크림치즈 아이스크림을 먹는 중이었다. 나는 크림치즈, 효진이와 정화 누나는 바닐라. 크림치즈가 제일 맛있었다. 효진이 한 스푼, 정화 누나 한 스푼, 나머지는 다 내 거. 순하면서도 꽉 찬 맛이다. 효진이는 커피를 달라더니, 아이스크림과 섞는다. 아포가토를 해서 먹는다. 저런 아이가 내 마사만 커리를 먹었어야 해. 다시 짜증이 밀려온다. 효진이는 아버지와 통화 중이다. 표정에서 경련이 인다.


-화장실 때문에 그래? 우리가 도와줄게.

-아냐, 손잡이가 있어야, 아니 됐어요.

-화장실 때문에 가야 하는 거야?

-네


변기에 앉아도 누군가 옷을 벗겨줘야 한다. 스스로 해결하려면 팔걸이가 필요하다. 나에겐, 정화 누나에겐, 세상 대부분의 사람에겐 참 쉬운 일이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루이뷔통 투명 케이스 토트백을 무릎 위에 올리고는 들어왔던 현관으로 다시 나간다. 다부져 보이는 효진이 아버지가 효진이를 번쩍 들었다. 카니발 조수석에 효진이가 무사히 앉았다. 까만 카니발이 사라질 때까지 본다. 효진이는 오늘을 위해서 6년 근 홍삼 앰플을 샀다. 보름 남은 시간, 매일 한 병씩 드세요. 긴 고민 끝에 홍삼이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성의껏 파우더를 바르고, 드라이를 했을 것이다. 화장실이 필요하면 압구정동에서 다시 잠실 임광아파트로 달려가야 한다. 내 마사만 커리는 어쩌자고 쓴맛이 났을까? 제대로 된 마사만 커리를 먹여줘야겠어. 또 봐야지, 뭐. 자발적인 의무감은 참 좋다. 아무런 부담도 없다. 가볍게 의지만 불타오른다. 다음번의 마사만 커리는 정말 완벽할 것이다. 어쩌니? 효진아. 한 번 맛들이면, 한 번만 먹고는 못 견뎌. 솜씨 좋은 네가 결국 나보다 맛난 마사만 커리를 만들어내겠지만... 홍삼 앰플 매일매일 잘 챙겨 먹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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