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행이 누군가에겐 크리스마스이기를
-일기에 올리시려면, 익명의 팬이 보냈다고 짧게 써주세요
이런 메시지와 함께 씨티은행 통장에 백만 원이 들어왔다. 감정이 정착하지 못하고, 붕 뜬다. 나는 또 해석을 해야 한다. 두렵다. 세상 공짜 없다. 호의라고 덥석 받는 거 아니다. 박민우 씨 꼴값 떠지 마시고요. 일기를 팔았고, 여행 중 밥값 좀 쏴달라고 구걸도 하셨잖아요. 아이고 좋아라. 대놓고 헤벌쭉하기 싫어서, 잠시 뜸 들이는 중이다. 좋다. 너무 좋다. 평소에 백만 원도 안 되는 전재산으로 아등바등인데, 백만 원이 생겼다. 그래서 좋다. 그래서 두렵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이고자 한다. 작은 증명이 됐다. 누구에게도 작은 돈일 수 없는 백만 원이다. 자, 재미난 여행 좀 해 주시오. 그런 주문이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외장하드 4 테라 바이트로 두 개. 총, 삼십만 원. 사진과 동영상을 두 하드에 저장한다. 하나가 고장 나도 하나는 남는다. 외장 하드 두 개. 내 여행의 필수품.
눈만 뚫린 마스크. 내 소중한 피부를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 선블록 돈 아낄 수 있다. 쭈글쭈글 피부는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죽을 때까지 발버둥 치도록 한다. 테러범으로 보일 수 있으니, 시내에서는 착용 금지. 8천 원.
약간 고품질 핀 마이크. 요즘 유행하는 ASMR, 나도 해보겠다. ASMR은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헉, 뭐가 이렇게 어려워? 해석 못 하겠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란다. 먹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카페 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방송이다. 여러분! 유튜브에 새로운 꿀 목소리 등장합니다. 조지아 카페에서 책장 좀 넘기다가, 바람 소리도 좀 담다가, 꿀렁꿀렁 와인 따르는 소리도 좀 담아볼게요. 필 받으면 와인에 라면 보글보글 출동합니다. 밖으로는 코카서스 산이 출렁, 안에서는 와인 쪼르르, 책장 사르르, 라면 후루륵. 대한민국 1% 꿀 목소리까지 접신합니다. 이런 유투버를 어떻게 외면하시겠어요? 미래의 대박 유투버는 그래서, 핀 마이크 구입합니다. 의외로 저렴하군요. 25,000원대.
힙업 밴드와 만능 밴드. 나의 슬픈 X자 다리는 허벅지까지 얇다. 하체는 중년의 구세주. 하체야 두꺼워져라, 두꺼워져라. 힙업 밴드를 허벅지에 걸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겠다. 허벅지와 엉덩이에 혹독한 자극을 주겠다. 만능 밴드는 어깨 운동용. 턱걸이 대신이다. 여행이 끝나면 나는 몸짱이 된다. 늘 꾸는 꿈이다. 이번엔 이루겠다. 이루고야 말겠다.
오즈모. 스마트폰으로 흔들리지 않는 동영상을 찍을 수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즉시 오즈모를 꺼낸다. 사각형의 농지를 반듯하게 담는다. 고요하고, 푸른 논밭과 파란 바다를 안정적으로 전달하겠다. 엔딩 크레디트로 아름다운 즉흥시를 올려볼까? 그런 유튜브 본 적 있으십니까? 아, 물론 안 할 겁니다만. 오즈모 12만 원.
삼각대. 스마트폰을 고정하고 먹거나, 이야기를 하겠다. 삼각대에게 인사하고, 윙크 찡긋, 헤벌쭉 악어 미소. 누가 봐도 외롭지 않은 미친놈으로 보일 것이다. 2만 원대로 샀다.
이렇게 사재껴도 될까? 살 때마다 철렁한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다. 곧 죽을 것만 같다. 이렇게 돈을 다 쓰면 어떻게 해? 0은 결코 파멸이 아니다. 0은 결코 패배가 아니다. 힘이다. 나는 써야 한다. 안다. 빠진 이를 금으로 덧씌워야 하고, 어버이날도 코앞이다. 그 돈은 남겨둬야지? 무슨 소리야? 익명의 독자님이 금니를 하라고, 부모님 효도 대신해드리려고 백만 원을 보냈겠어?
그래서, 그래서
드론을 샀다.
드론! 공중촬영 카메라. 비싼 건 못 사고 170,000원짜리. 중국 국민 드론이라는 SYMA 제품을 골랐다. 국제 배송이다. 늦으면 십일도 넘게 걸린다. 어떻게든 받게 될 걸 안다. 내가 머물던 방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솟구치더니 숙소와 숙소 옆 집들과, 마을을 둘러싼 산과 산 곁을 흐르는 강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왜 갑자기 세계 테마 기행인 거죠? B급 방송이면 충분한데, 쓸데없이 웅장해서 보는 사람들은 불편하기까지 하다. 드론 무게에, 불편함에 두고두고 후회할 걸 안다. 그런데도 산다. 살 수밖에 없다. 나를 휘두르는 이 힘에 휘둘려야 한다. 그 힘은 익명의 독자에게서 왔다. 보이지 않는 박수를, 환호를 보내는 당신, 당신, 당신! 다 보인다. 당신들도 공범이다. 그러니까 나는 반쯤 미쳐셔, 클릭질을 해야 한다. 네이버 페이, 스마일 페이, 삼성 페이. 어찌나 능숙한지. 곧 현관 앞에 산처럼 택배 물건이 쌓일 것이다. 다 가져갈 것이다. 내 여행은 누군가의 축제여야 한다. 내 모든 궁상과 찌듦을 동영상으로 기록하겠다. 나는 추접하게 영롱할 것이다. 추접(혹은 주접)이 어떻게 영롱할 수 있어? 보면 안다. 이상하게 마음 가는 궁상은 내가 세상 제일이다. 모든 악플러로부터 나를 지키려면 일단 멘탈부터 강해져야지. 으쌰 으쌰! 이륙을 위해 서서히 시동을 걸고 있다. 드론 카메라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