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보틀, 신경치료, 남문 떡볶이, 어버이날

5월이라고요. 하늘 보세요. 꽃 보세요.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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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블루보틀 이야기뿐이다. 커피 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 더 그렇게 보인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우기는 세상. 여자들은 다른 여자의 립스틱과 군살 없는 팔뚝을 보고, 남자들은 다른 남자의 차와, 그의 여자 친구를 본다. 누군가의 머릿속엔 게임이 있고, 누군가의 머릿속엔 커피가 있다. 내 머릿속에도 커피가 있다. 성수동 블루보틀이 문을 연지 4일 째다. 실제로 난리가 났다. 서너 시간 줄 서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별 다섯 커피 장 대표가 함께 가보자고 한다. 당장은 안 된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려서 마실 수 있을 때, 그때 가겠다. 장 대표는 별 다섯 커피와 블루보틀 커피를 동시에 먹어보자고 한다. 흠! 블루보틀 커피는 나쁘지 않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도쿄에서 총 5번 마셨다. 라테의 경우 대단히 맛있지 않다. 그래서 블루보틀을 존경한다. 심심한 맛을 시그니처로 삼았다. 대단한 배짱이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무릎을 탁 치며 맛있다고 할 수 없다. 우유맛이다. 절대로 커피맛이 아니다. 맛있다면 스팀으로 데운 우유 덕이다. 샷을 더 넣거나, 다크 로스팅한(세게 볶은) 원두로 뽑은 라테와 전혀 다른 맛이다.


- 저는 순한 맛이 좋아요.


순한 맛이 좋은 사람들에게 딱인 라테다. 순해서 딱이라는 거지, 블루보틀의 순한 맛이 대단해서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라테를 마시면서 블루보틀 커피맛을 감지하는 사람은 혀 돌기가 나노급 촉수다. 평양냉면에 녹은 MSG를 샅샅이 찾아낼 수 있다. 블루보틀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드립 커피를 추천하겠다. 도쿄에서 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정말 맛있었다.


2


- 다음에 오시면 신경치료 마무리 들어갈게요.

- 지금 뭐 먹어도 되나요?

- 30분 후에 드세요.


치과를 나오자마자 남문 떡볶이로 들어간다. 30분의 경고도 무시한다. 기분 좋은 허기다. 얼마만의 허기지?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의 2교시 위장처럼 쌩쌩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효진이가 준 6년 근 홍삼 때문일까? 어머니가 끓여 주신 옻닭 때문일까? 지난밤 했던 커피 관장 때문일까? 그동안 역류성 식도염으로 목과 가슴이 불로 지진 듯 아팠다. 그게 말끔해지더니, 맹렬한 식욕이 솟구친다. 수원 남문에 굉장한 떡볶이집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병원의 경고를 무시하다니. 나답지 않다. 중학교 2학년의 허기는 아무도 못 막는다.


-튀김 1인분요. 떡볶이 양념 섞어서요.


달고, 맵다. 대단하다까지는 아니다. 내가 떡볶이 양념에 기대하는 맛이다. 튀김이 바삭바삭. 떡볶이 양념은 특별해선 안 된다. 카레 가루 넣으면 안 되고, 짜장 넣으면 안 된다. 다시다, 물엿 양심 없이 콸콸 붓고, 파 길쭉하게 썰어서 쏟으면 된다. 최근 1년 중 가장 젊어진 몸이다. 침침한 눈까지 맑아졌다. 몸이 아프면, 봄은 없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명치가 타 들어가면,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은 나 몰래 피고, 나 없이 진다. 떡볶이 1인분 추가요. 나를 말릴 사람은 없다. 몸이 조금만 좋아져도 식욕은 난폭해진다. 몸뚱이는 뱀처럼 간교하다. 나는 늘 몸뚱이에 진다. 아프면, 더 아프고, 멀쩡하면, 기고만장하다. 튀김에 떡볶이 양념 부어줄 수 없다고 했던 떡볶이 집이 생각난다. 왜 그랬을까? 딱 한 집이 그랬다. 튀김이 눅눅해지는 건 자기 입에 안 들어가도 괴로워서였을까? 떡볶이 양념이 아까워서? 신비롭게 괘씸하다. 그나저나 남문 떡볶이 맛있다. 좀 달지만, 맛있다. 중학교 2학년생에겐 이보다 맛있는 떡볶이는 없다.



3

현금인출기에서 40만 원을 찾았다. 봉투 두 개에 20만 원씩


-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봉투에는 이렇게만 썼다. 글 쓴다는 아들놈이다. 그 이상은 못 쓰겠다. 낯간지럽다. 불편하다. 애초엔 백만 원을 50만 원씩 나눠드려야지 했다. 줄어들더니 40만 원이 됐다. 더 줄기 전에 얼른 현금을 뽑았다. 좀 홀가분하게 떠나도 되겠다. 이 봉투는 나를 위한 봉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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