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 원을 날리다. 비행기표도 날리다

무기력이란 친구와 겨울잠을 자고 싶다

by 박민우






열흘 후면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날아간다. 숙소를 알아보다가, 항공권을 확인했다. 5월 20일 출국인데, 5월 21일 도착일 수도 있다. 5월 20일 당일 도착하는구나. 낮이네. 다행이네. 오는 날은 몇 시에 도착이지? 8월 20일에 출발해서....?

5월 20일?

오는 날이 5월 20일이라고? 50월 20일 출국해서 5월 20일 입국하는 발권을 했다. 더 싼 항공권을 찾다가, 결제가 안 되니까 낙심도 하다가, 에잇, 어쩔 수 없지. 눈 질끈 감고 택한 항공권이다. 질끈 감지 말았어야지. 뒤죽박죽, 그 와중에 이런 항공권을 끊었다. 더 늦기 전에 날짜를 조정해야 한다. 고투게이트(Gotogate)라는 해외 여행사다. 한 시간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예전에 환불도 받아낸 사람이다. 방콕에서 놀라운 인간 승리를 일궈냈다.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보다 내가 더 지독한 사람이다. 영어로 쏼라쏼라 기계음을 알아듣고, 실물 사람인, 전화상담원에게 또박또박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환불까지 받아냈다. 아마 아일랜드 더블린 사무실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뉴스에 나와야지. 이게 내 입으로 소문낼 일인가? 세상이 이렇게 멍청하고 게으르다. 이번엔 환불까지는 아니다. 날짜만 바꾸면 된다. 홈페이지에 상담원 연결 번호가 있다. 070으로 시작한다. 혹시 한국에 지사가 있나? 그러면 나야 땡큐지.

영어로 된 안내방송이다. 항공권이 있는 사람, 일정을 바꾸고 싶은 사람은 1번을 누르시오. 하라는 대로 한다. 되는 게 맞나 싶을 때 누군가가 받는다. 실물 사람이다. 영어로 인사한다.

-리턴 티켓 일정을 바꾸려면 한국 돈으로 553,310원을 내셔야 해요.

남자 상담원은 숫자 하나하나를 유치원생 가르치듯 또박또박. 삐쭉빼쭉 숫자가 거슬린다. 항공권 가격이 1,100,000원 정도였다. 보험이다 뭐다 추가해서 1,200,000원이다. 일정 바꾸려면 55만 원을 내라고? 그냥 새로 사라는 거잖아. 이 날강도 놈들아.

- 취소할게요.
-취소하시면 301,241원이 공제됩니다. 여기에 세금이 추가될 수가 있어요.
-네, 알겠어요. 지금 전화하는 곳이 어디죠?
-스웨덴 스톡홀름이에요. 더 궁금한 사항 있나요?
-아뇨.

스톡홀름은 새벽 세 시다. 세계에서 제일 물가 비싼 스톡홀름에서, 세계에서 제일 인건비가 비싼 스웨덴 사람이 새벽에 일을 한다. 그 사람의 일당은 한국에 있는 멍청이가 대줘야 한다. 세상 멍청이가 더 많아져야, 스톡홀름 사무실은 번창할 것이다. 항공권을 끊을 때 취소가 가능한 뭔가를 팔았던 것 같다. 어이가 없다. 그냥 환불해줘야지. 그래서 싼 거라고? 제값 내고 무조건 우리나라 여행사 항공권을 살 것. 또 멍청하고, 탐욕스러워지겠지만 나는 다짐한다. 하여튼 무료 취소권은 몇 만 원을 더내야 했다. 그딴 거 일일이 구입하려면 저가 항공권을 왜 사? 보험도 정말 안 사고 싶었지만 비행기 사고가 난다면 보험은 부모님께 큰 효도선물이다. 그래서 보험은 구입했다. 짐이 없어지면 보상해 준다는 보험 상품도 샀다. 무료 환불권은 끝까지 안 샀다. 삼십만 원이 날아갔다. 저녁엔 드론 카메라, 오즈모(촬영 시 평형을 맞춰준다), 허벅지 단련용 밴드가 왔다. 거의 나았다고 생각했던 역류성 식도염이 기세 등등 목구멍과 가슴을 할퀸다. 종일 커피 석 잔을 마시고, 생크림 딸기 크루아상과 마늘바게트와 초콜릿이 박힌 빵을 먹었다. 낮에는 비엔나 소지지와 닭볶음탕, 저녁엔 김밥을 먹었다. 참기름이 듬뿍 발린 김밥이었다. 역류성 식도염에 피해야 할 음식은 밀가루, 커피, 기름진 음식이다. 나는 내 고통이 억울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자유롭고자 짐을 싼다. 여행 다닌다. 명치 통증이 발광한다. 후우우, 하아아. 날숨을 길게, 더 길게. 이 모든 순간은 다 지나간다. 왜 부들부들 떨지 않지? 나는 성숙해졌으니까. 아니, 아니다. 무기력감이다. 인천 공항에서 뜻밖의 문제가 생긴다면, 집에 올 생각이다. 내심 기대 중이다. 코카서스 3국 안 가겠다. 이런 무력감은 처음이다. 새로운 장애물이다. 무기력감, 무기대감. 그래서 새로운 여행이다. 텅 빈 내가 있다. 울고 싶다거나, 화를 내고 싶다는 감정이 없다. 내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 잠이 마지막 잠이어도 된다.

돌아오는 비행기표는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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