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함으로는 부족한 인내
가라앉는 느낌의 팔십 프로는 몸상태다. 몸에 지배받는다. 자존심이 상한다. 명치와 목젖 주위의 이물감이 괴롭다. 잘 때도 할퀸다. 늘 크고 작은 병을 끼고 살았다. 멀쩡한 몸은 행복일까? 이십 대 때는 상대적으로 쌩쌩했다. 악몽을 자주 꿨고, 에이즈가 창궐해서 세상이 끝장날 거라 여겼다. 자신만만했지만, 살짝만 들춰봐도 열등감이 우글우글. 그래도 지금보다 행복했다. 왜냐면 과거니까. 나는 어리석으니까. 과거의 너저분한 순간들을 제거하고, 화사함만 남겼으니까. 그래 놓고 그리워한다. 역류성 식도염만 없다면, 나는 이십 대 때보다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어리석으니까, 지금 이대로 행복할 수 없다. 어떻게 식도로 소화액이 역류하는데 행복할 수가 있지?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다.
지하철에서 문뜩 장국영을 검색했다. 내 또래에 호텔 24층에서 몸을 던졌다. 아팠을 거야. 자신의 삶을 포기할 만큼 아팠을 거야. 삶을 포기하는 자가 딱한 게 아니라, 삶을 완주하는 이들이 대단한 거다. 완주는 대단한 성과. 나는 일단 장국영보다 오래 살겠다.
이름만 듣던 강릉 테라로사 대표 동영상을 봤다. 사놓은 땅 강릉시 구정면에 카페를 차렸다. 목 좋은 곳에 차릴 돈이 없어서였다. 처음엔 돈가스 식당이었다. 4,5년간 손님이 한 명이라도 온 날보다 오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이 부분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이미 망했다. 망한 가게다. 망한 가게를 5년간 열어 두었다. 나라면 닫았다. 분당에서 스파게티집을 할 때 꽤나 바빴다. 그래도 한가한 시간은 있다. 지루하다. 별 생각이 다 든다. 주문이 빗발치면 재밌다. 그제야 화색이 돈다. 그 순간들이 없었다면 진즉에 닫았다. 테라로사 사장은 분명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봤겠지. 그렇다 해도 매달 직원들 월급을 줘야 한다. 통장의 잔고가 푹푹 썰려나가는 걸 봐야 한다. 돈 갚으라는 독촉도 하루가 멀다 하고 온다. 고매한 신념 하나로 되는 게 아니다.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갚을게. 곧 잘 될 거야. 아쉬운 소리도, 변명도 매일 해야 한다. 절레절레. 성공하면 다 성공담일까? 5년을 채운 막막한 하루는, 괜찮다고 해도 되는 것일까?
나라면 강릉 깡촌에 카페를 열지 않겠다. 그렇게 못 버틴다. 아니, 안 버틴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고, 나는 가난한 글쟁이가 되었다. 성공은 어쩌면 간단하다. 남이 하지 않는 일로, 적정선을 넘어서 버티면 된다. 물론 '그 일'이 경쟁력이 있어야겠지만. 적정선을 넘어서 버티면 어마어마한 성공이 기다린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못하겠다. 버티는 그들은, 그들대로 위대하다. 보통의 눈으로 물러날 줄 아는 내가 열등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면 차라리 부산 대학가 작은 골목에서 시작하겠다. 작게, 빚 없이, 소곤소곤. 거창한 미래에 오늘을 뺏기지 않고, 그날 판 돈으로 탕수육을 사 먹겠다. 그런 가게는 대부분 망하고, 나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문을 닫는 날, 내 한심한 과거를 돌아보겠지. 매일매일 기대하고 실망했던 시간들은 쓸쓸하지만 맛있었고, 새로운 길도 터줬다. 카페에 묶여서 못했던 여행을 할 테지. 짐을 싸고, 남미로, 아프리카로 떠돌 테지. 그러니까 민우야. 너는, 지금 과거의 꿈이야. 군대 신교대에서, 교대 사무실에서 꿈꾸던 사람이 너야. 여행자보다 더 대단한 꿈은 이작 없잖아. 테라로사 사장도 더 여행하고 싶을 거야. 그의 꿈도 너야. 네가 이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