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태국 한국 대사관 홈페이지 공지를 보고, 또 자동 연장이 됐구나. 안심도 되고, 짜증도 나더군요. 태국은 여행자 체류기간을 자동으로 여러 번 연장해 줬어요. 더 이상 연장은 없다. 그래 놓고도 몇 번을 더 해줬죠. 돈 바쳐가며 연장한 사람만 호구된 거죠. 신청 안 한 사람도 자동 연장을 해줬으니까요. 태국 정부가 계속 오냐오냐 해주지는 않겠지. 겁을 먹고 10월에 1,900밧(약 7만 원)을 내고, 2달 연장을 받아내요. 그랬더니 1월 15일까지 또 재연장이라네요? 제 비자는 12월 30일 날 만료거든요. 1월 15일 전에만 가서 연장 신청을 하면 되겠군. 1월 13일쯤에 또 자동 재연장. 신청 안 한 사람도 안심하세요. 또 이러면 진짜 허탈하겠지만, 남의 나라에 얹혀사는 주제에 말 너무 많으면 안 되죠. 어제 대사관에 전화를 했어요. 혹시 비자 연장에 대한 발표가 나왔나 해서요.
-네? 1월 15일까지 자동 연장 아닌데요? 어디에서 보셨어요?
무슨 소리야? 대사관 홈페이지로 다시 들어가 봐요. 1월 15일까지 재연장. 분명 맞아요.
-비상사태 재연장, 1월 15일까지
비자 연장이 아니라, 비상사태 재연장이었던 거였어요. 아아아, 이런 멍청이. 태국 이민국에 부랴부랴 전화를 해요. 저처럼 똥줄 타는 외국인이 많나 봐요. 상담원과 통화가 하늘의 별따기예요. 세 시간 만에 드디어 통화가 됐어요.
-30일 이후로 하루 500밧씩 벌금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추방되셔야 해요. 이민국에 직접 가서 확인해 보세요.
벽돌로 후두부를 강타당한 느낌이에요. 추방이요? 자기 이야기 아니라고, 막말해도 되는 건가요? 추방을 또 제가 안 당해본 게 아니라서요. 그런 경험이 없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발 뻗고 잤을 거예요. 캄보디아로 육로로 넘어갔다가, 다시 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었어요. 현금이 없다는 이유로 입국 거절을 당해요. 규정상 여행자는 400달러 현금이 있어야 해요. 그런 규정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러나? 서럽기만 했죠. 지금은 이해가 가요. 별별 사람들이 국경선을 드나들며 비자를 연장해요. 제가 범죄자일 수도 있고, 세금 한 푼 안 내면서 사업을 하는 파렴치한 놈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영국인 친구와 나란히 문전 박대를 당해요. 영국 친구는 이전에도 한 번 육로로 캄보디아를 다녀온 게 이유가 됐어요. 영국 친구는 400달러까지 보유한, 부유한 여행자였는데도요. 최근 국경선 분위기가 그래요. 2년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안 됐어요. 그때 우리를 쫓아내면서 하는 말이
-비행기로 들어오면 아무 문제 안 됩니다
였어요. 아무 문제 안 되기는요? 캄보디아에서 거금 들여서, 방콕으로 입국하는 항공권을 구입해요. 세상에! 제 여권에다 '돈 없어서 쫓아냄'이라고 태국말로 따박따박 써놓은 거예요. 그걸 보고 누가 입국을 시켜주겠어요? 하늘이 도왔는지, 마침 저에겐 제가 쓴 책이 있었어요. 그걸 보여줘서 가까스로 입국이 됐어요. 진짜로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글쟁이로 덕을 크게 본 날이었죠. 그렇게 혼쭐이 난 마당에, 추방이란 말까지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죠. 당장 쫓겨나면, 비행기는 있나? 의외로 매일 있기는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자가 격리는 어디에서 하지? 그 경비는 어떻게 마련하지(총 백사십만 원 정도가 들더군요)? 한국 가면 강연하면서 생활비라도 벌었는데. 코로나 시국에 뭐 먹고살지?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갑자기 폭설 한국으로 순간이동을 한다고? 마음의 준비는 됐니? 추위와 고립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는 됐냐고? 내가 태어난 소중한 나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단두대로 끌려가는 것만 같아요. 잠이 다 안 오더라고요. 이민국 사람들은 또 얼마나 까칠한데요. 감정 없는 로봇 같아요. 내일 당장 출국하세요. 로봇 말투로 저에게 이렇게 말할까 봐 너무나 무서워요. 한국 대사관으로 일단 가요. 체류 허가를 부탁한다는 간단한 서류가 필요해요. 8일간 불법 체류를 했는데도, 무심하게 서류를 끊어 주더군요. 이때 약간 안심이 됐어요.
-연장이 될지는 이민국 소관이라서요.
친절하지만, 답변은 냉정하더군요. 이민국이 또 멀어요. 태국은 택시비가 저렴한데도, 톨게이트 비까지 만 오천 원이 나오더라고요.
-왜, 인터넷으로 예약을 안 했어요?
인터넷 예약이요? 그걸 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대사관에서 서류 발급을 해줄까? 이민국에선 나를 받아줄까? 일단 부딪혀 보자. 한고비, 한고비 넘어서 왔더니 왜 예약을 안 했냐고요? 이민국은 붐비는 걸 막으려고, 날짜와 시간대까지 예약, 접수를 받아요. 다행히 오늘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딱히 문제는 안 되겠구나. 웬걸요? 서류 접수하는 사람이 저를 차갑게 노려보면서, 예약도 안 하고 온 뻔뻔한 인간아. 눈빛 공격을 하더군요. 잘못했습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쏘리'죠. 얼마든지 굽실거릴 수 있어요. 쫓겨나지만 않는다면요. 혼나야죠. 마음껏 혼내 주세요. 무조건 제가 잘못했어요. 남의 나라에 살면서, 하라는 대로 안 한 제가 중죄인 맞아요. 구석에서 손이라도 들고 있을까요?
-5,900밧 내세요.
8일간의 불법 체류비 4천 밧에, 체류기간 연장 신청비 1,900밧. 이십만 원이 넘는 거금이에요. 늘 전재산이 백만 원대인 저에겐 어마어마한 타격이죠. 괜찮아요. 아니 감사해요. 쫓아내겠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게 너무너무 고마워요. 이돈만 내면 머물 수 있게 해 준다잖아요. 드디어 체류 허가 도장을 받았어요. 1월 21일까지 머물 수 있고, 21일 이후에 다시 두 달 꾹꾹 채운 도장 찍어준대요. 왜 일을 두 번씩 하게 하냐? 따지다뇨? 알겠습니다. 또 오라면 오겠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하늘이 무너졌는데, 솟아날 구멍을 찾았어요. 따뜻한 나라에서 조금은 더 뒹굴뒹굴 판다곰처럼 살아 보래요.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남의 나라에서 살고 싶냐고요? 노력하는 걸로 봐주세요.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지는 것들도 적어져요. 여전히 좋은 것들에게 최대치의 애정을 쏟고 싶어요. 말랑말랑한 태국의 날씨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지옥에서 돌아온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겠습니다. 오늘만큼은요.
PS 매일매일 글을 씁니다. 태국 방콕에서 가난과 느림을 벗 삼아 매일 글을 씁니다. 이곳의 소중한 온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매일 따뜻한 단팥죽 같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