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인간의 추억담에 대하여
어쩌면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해주세요. 추억 소환하는 글들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기억이 정확하면 얼마나 정확하겠어요? 머릿속 이미지죠. 나는 그렇게 기억하겠다. 일종의 고집일 수도 있겠네요. 어릴 적 제 모습은 지질하다, 꾀죄죄하다, 비호감이다, 얍삽하다 정도예요. 또래들도 잘 안 놀아 준 데다가, 한 입만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구멍가게 집 아들이면 사실 남들이 달려들었어야죠. 집에 먹을 게 천지였으니까요. 다 그림의 떡이죠. 먹어도 되는 과자는 단 하나도 없었어요. 과자를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고요. 오리온 왔다 초코바는 굉장히 좋아했지만, 손댔다가는 빗자루로 엉덩이가 불이 나도록 맞아야 했어요. 먹고 싶은 건 떡볶이, 덴뿌라(그땐 어묵이란 말을 잘 안 썼어요), 순대, 핫도그였고, 누가 핫도그를 먹거나, 떡볶이를 먹고 있으면 쪼르르 달라붙어서 한 입만 달라고 애걸했어요. 대부분 안 주죠. 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어린아이들은 제가 무서워서라도 한 입 주기는 하는데, 엄마들에게 자주 들켰어요. 저런 아이랑은 놀지 말라면서 아이와 함께 싸늘하게 멀어지면, 그때부터 쓸쓸해지더라고요. 굴욕감이란 단어를, 몸으로 먼저 익힌 셈이죠.
국민학교 1, 2학년 때는 산수에서 좀 헤맸어요. 성질이 급한 제가 앞자리부터 계산하려고 했거든요. 십 단위까지는 날아다녔는데, 백 단위로 늘어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거예요. 답이 거의 보이는데, 자꾸 틀려요. 아버지가 어이없어하며, 뒷자리부터 셈을 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최초이자, 마지막 가르침이었죠. 그때부터 산수에서 만큼은 날개를 달아요. 학교 대표로 산수 경시대회도 나갔어요. 우러러보던, 반장보다도 성적이 더 잘 나올 때도 있었죠. 그러더니 4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제가 반장이란 것도 하게 되더군요. 제가 이렇게 자수성가한 인물입니다. 찌들고, 비굴한 아이가 차근차근 시험 성적을 올려가며, 신분 상승을 해냈어요. 그땐 성적이 최고였으니까요. 집안 형편이야 늘 안 좋았지만,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 비하면 처지야 나은 거 아닌가요?
반장이 되면서부터는 담임 선생님 눈치를 주로 봤어요. 5학년 때였나? 담임 선생님이 사적인 심부름을 그렇게 자주 시키셨어요. 선생님 댁이 학교랑 가까웠는데, 아기를 봐 달라는 부탁을 자주 하셨어요. 뭐 좀 가져오라는 심부름도 자주 시키셨죠. 선생님 집이 어딘지를 알고 있다는 것, 심부름을 나에게만 시킨다는 것. 집안의 자랑이었죠. 청소를 보통 분단별로 하잖아요. 아이들이랑 쫓고, 쫓기며 웃다가 갑자기 스산한 기운이 느껴져요. 선생님이 전봇대처럼 서서 노려 보시는 거예요. 청소 시간에 딴짓을 했다 이거죠. 노려만 보시는 거예요. 곧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처럼요. 민우야,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믿음을 저버리고, 청소시간에 뛰면 어떤 선생님은 얼음처럼 굳어서 노려만 보시더군요. 차라리 혼을 내시지. 하루는 실내화를 사 오래요. 반장이면 담임 실내화 정도는 사드려야 하는 시대였나 봐요. 문제는 어떤 실내화를 원하시는지 모른다는 거였죠. 아이들 실내화야 하얀색 단화면 되지만, 귀하디 귀한 선생님 실내화는 과연 무엇이 적합하냔 말이죠. 예쁜 말표나 가정표 신발을 사드려야 하는 건지, 실내화답게 단정한 걸 사다 드려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야 말이죠. 어머니와 숭인시장 신발 가게에서 천 번의 고민 끝에 기본적인 가죽 재질(진짜 가죽은 아닌) 신발을 골라요. 가죽이 X자 형태로 교차하는 기본적인 디자인 있잖아요. 선생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꽃무늬가 알알이 박힌 굽 좀 있는, 가정표 신발을 골랐어야 했어요. 너무 오래 고민을 해서, 되려 실패하고 말았죠.
가난한 집 아이가 반장이 되면, 골치가 지근지근해요. 운동회 때 다른 반 반장 어머니들은 간식을 돌려요. 아예 외면할 수도 없으니, 제가 초코파이만 6박스를 낑낑대며 학교로 가지고 가곤 했어요. 어머니가 학교 오는 건, 일단 제가 싫었어요. 예쁘지도 않고, 촌스러운 어머니를 당시에는 창피해했거든요. 몇 학년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는데, 담임 선생님이 저를 대놓고 미워하더라고요. 명색이 반장인데 입만 뻥끗하면 그렇게 면박을 주시더라고요. 너 까짓 거는 반장도 하지 말고, 입도 열지 말아라. 거의 그런 분위기였죠. 그런 선생님이 어느 날부터 상냥해져요. 성인이 되고 나서 알았어요.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서 돈봉투를 건네셨대요. 내가 하도 우는 소리를 하니까, 저 몰래 학교를 찾아가신 거였어요. 어머니에게 그런 실행력과 돈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 비밀을 십 년 이상 지키셨다는 것도 놀랍더라고요.
어릴 적 저는 늘 눈치만 보며 살았어요. 화사한 기억이 별로 없죠. 대학교 교양관 앞에서 종일이를 만나면서, 저의 기억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게 돼요. 이놈도 저랑 같은 고려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더라고요. 전 몰라 봤어요. 종일이가 먼저 저를 알아보더군요. 국민학교 때 단짝 친구였거든요. 재수를 하지 않아서, 학번은 저보다 위더라고요.
-민우야. 네가 나랑 같이 놀아줘서 얼마나 영광이었나 몰라. 너는 그냥 빛나는 아이였어. 모두가 너를 좋아했잖아. 왜 나와 놀아주는 걸까? 그게 이상할 정도로 넌 인기가 많았어.
그럴 리가요? 종일이는 센스가 넘치는 아이였어요. 생각도, 말투도 어른 뺨치는 성숙함이 있었죠. 썰렁한 농담을 하면 머리 끄덩이를 잡아당기는 장난을 많이 쳤어요. 말로 표현하면 폭력적인데, 그런 느낌보다는 재치가 넘치는 아이의 신선한 리액션 정도였죠. 또래들에겐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어요. 종일이 앞에선, 코미디언 흉내 같은 거 내면 안 돼요. 그런 저질 코미디는 어린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짓이거든요. 우리 둘은 그런 유치한 아이가 되어선 안 됐으니까요. 저 역시 종일이와 단짝인 게 무척이나 자랑스러웠어요. 종일이 눈에는 제가 그런 아이였답니다. 담임에게 갈굼 당하고, 집에서는 형에게 얻어터지고, 동네 친구는 하나도 없는 쭈글이가 아니라요. 그럼 저는 일부러 저를 자학하는 건가요? 아무 증거도 댈 필요없는 추억 놀이를 하면서요? 모르겠어요. 종일이가 본 모습도 일부는 맞겠죠. 내 안에 갇혀서 심란해하는 상황은 남들은 잘 몰랐을 거고요. 그러니까 제 추억담은 한 귀로 흘려들으시라고요. 과거의 시간에 덧칠을 한, 사실은 새로운 작품인 거예요. 지금의 제가 보고 싶은 한 때의 이야기인 거죠. 괜히 말씀드렸나요? 일종의 감동 파괴인가요? 그래도 저는 그 시간으로 자주 놀러 갈 거예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공감이 될 수 있다면요. 우리가 함께 보낸 그 시간이 그곳에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망망대해에서 수영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지평선이 보이면 소원이 없겠다. 뭔가 부질없는 자맥질 같을 때가 있어요. 글을 쓰는 것 자체가요. 그러다 문득,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상상을 해요. 이제는 살았다. 그런 순간이 언젠가 한 번은 오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