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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an 19. 2021

나는 만화책과 함께 컸다 - 소소한 내 만화책 역사

그땐 만화책이 최고였으니까요

80년대 만화방은 진지했어요. 만화가게에서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이 활짝 열려요. 호랑이 얼굴의 아주머니가 한 아이를 끌어내요.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올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아이는 끌려가면서 울부짖어요. 저렇게 우는 걸 보면, 거의 반을 죽여놓겠다는 거죠. 아니, 만화책이 어때서요? 제 손에는 김철호의 '나간다 비룡 권법'이 들려 있네요. 만화책이 마약이라도 되나요? 저렇게 처절하게 끌려나가야 할 정도로 큰 죄인가요? 80년대 만화방은 좀 억울해요. 그렇게나 순진하고, 바람직한 독서 공간을 우범지대로 낙인찍어요. 그 흔한 라면 같은 것도 안 끓여주고, 오로지 만화만 보는 열혈 독서광들에 대한 모독이죠.



1. 만화에 눈을 뜬 이유, 소년중앙과 보물섬

소년중앙은 어린이 잡지였고, 보물섬은 대놓고 만화 잡지였죠. 여기에 실린 만화들을 모르면, 또래들과 말이 안 통했어요. 이상무의 '달려라 꼴찌', 보물섬의 '달려라 하니', '아기공룡 둘리'가 큰 인기를 끌었죠. 매달 한 번씩 나오는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요. 각자가 사보는 잡지가 다 달랐고, 그걸 서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잡지를 읽을 수가 있었죠. 우리 집은 '어깨동무'를 봤어요. '주먹대장' '요철발명왕'이 유명했지만, 소년중앙이나 보물섬의 인기에는 못 미쳤죠. 그래도 전 '요철발명왕'의 명장면을 잊지 못해요. 작은 상자를 만들고, 상자에 구멍을 뚫어서 썰매를 타는'썰매집'을 개발해요. 추위 걱정 없는, 완벽 방한 썰매라니. 에디슨도 이런 썰매는 못 만들죠. 보물섬은 어깨동무가 나온 육영재단에서 만든 만화잡지였어요. 늘 부록으로만 나오는 만화만 보다가, 만화만 있는 잡지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충격은 또 얼마나 컸게요. 에디슨이, 테슬라가 이런 어마어마한 발명품을 만들 수나 있었을까요?


2. 순정 만화에 눈을 뜨다, 들장미 소녀 캔디


80년대 초반에 영아네 집에 세 들어 살았어요. 영아는 저보다 네 살 정도 어린아이였고, 그 아이 어머니는 새댁이라고 불렀어요. 새댁 아주머니가 '들장미 소녀 캔디'를 빌려와요. 저도 아주머니 옆에서 기다렸다가 한 권씩 읽었어요. 고아지만 씩씩한 캔디가, 닐과 이라이자에게 들들 볶이다가 안소니를 만나죠. 안소니가 말에서 떨어져 죽어요. 이렇게 가슴 아픈 비극은 뭔가요? 안소니와 꽁냥꽁냥 사귀면서, 닐과 이라이자에게 복수하는 걸 기대한 저는, 큰 상처를 받아요. 한술 더 떠서 안소니 닮은 테리우스 역시, 자기 때문에 불구가 된 여배우에게로 돌아가죠. 캔디의 연애운은 어쩌면 이리도 없나요? 조숙했는지 그런 내용들이 다 와 닿더군요. 커서 캔디를 다시 한번 읽어 봤는데, 탄탄하더라고요. 그 당시 일본이 서양에 얼마나 환상을 갖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죠.


3. 해적판 만화들의 범람 - 시티헌터, 공작왕, 북두의 권, 드래곤 볼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손바닥 크기의 일본 만화책이 대유행이었어요. 불법으로, 조잡하게 번역된 걸 가방 속에 집어넣고, 수업 시간에 몰래몰래 봤죠. 교과서에 몰래 끼워놓고, 조마조마해하며 읽었어요. 그중에도 '북두의권'과 '시티헌터', '공작왕' 등이 인기가 많았어요. '시티헌터'는 당시 학생들이 소화하기엔 좀 버거운 섹스 코미디 장르였어요. 불법 번역물도, 남자 주인공의 발기된 장면은 하얗게 지워 놨더군요. 얼마나 모범적인 해적판인가요? 사춘기 소년들에겐 묘하게 흥미로운 만화책이었어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슬아슬하고, 파격적인 만화책이었죠. '드래곤볼'이 등장하면서, 불법 만화계는 일순간에 평정돼요. 이렇게까지 재밌을 수가! 손오공을 재해석한, 우주를 넘나드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만화였죠. 뒤로 갈수록 끝도 없이 강해지기만 하는 전투력에 싫증나기는 하더군요. 그래도 초중반의 재미는 역대급이었어요.


4. 그렇다고 한국 만화가 부실했는가? 한국 만화도 대단했습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기존 만화의 수준을 급 끌어올렸어요. 일단 줄거리가 탄탄했죠. 까치 오혜성과 라이벌 마동탁, 사랑하는 여자 엄지의 삼각관계는 충분히 팽팽했고, 비극으로 끝내는 과감함이 남달랐죠.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 명대사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놨죠.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아마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했을 거예요. 줄이, 줄이 말도 못하게 길었답니다. 혜성이의 엄지에 대한 사랑은 너무 지독해서, 끝내 비극이 되고 말았죠. 이현세의 라이벌은 아무래도 허영만이죠. 허영만 만화는 장르가 굉장히 다양했어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군과 맞서는 히어로물 '각시탈'에서부터, '비트' 같은 처절한 청춘물, '타짜' 도박물, '오, 한강' 역사물, '식객' 식도락 물로 국민적 사랑을 받아요. 다양한 장르를 빈틈없이 완성시켰죠. 허영만과 환상의 파트너인 스토리 작가 박하, 김세영의 공도 컸죠. 이재학의 서늘하고, 고독한 검술 이야기, '검신검귀'. 고행석의 배꼽 잡는 명랑물(구영탄이 나오는), 탄탄한 스토리의 왕, 박봉성이 당시 만화 가게의 스타 작가들이었어요. 그런 만화책을 쇼핑백에 담아 와서는 배 깔고, 귤 까먹으면서 한겨울을 보내는 게 낙이었어요. 읽어야 할 만화책이 많을수록 행복감은 더욱 커졌죠.


5.  어른이 되었는데도 재밌음 ' 이나중 탁구부' '슬램덩크' 'H2'

-이나중 탁구부를 재밌게 봤다고 하니까, 애가 다르게 보이더라. 그딴 걸 보고, 웃음이 나와?


친한 누나가 정색을 하고 '이나중 탁구부'는 쓰레기라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요? 그걸 읽다가, 아랫배에 쥐가 났는데요. 저에게는 인생 만화책이거든요. 막장 개그코드인 거야 인정해야죠. 그렇게 파격적으로 더럽고, 추접한 만화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되려 아름다운 충격이 되더라고요. '슬램덩크'는 최고의 스포츠 만화 아니겠습니까? 평범한 주인공이 각성해서 대단해지는 전개야 뻔하지만, 각 캐릭터들에게 공을 들인 정성을 보세요. 각 인물들의 동작도, 실제 NBA 사진들을 참고해서 그런지 생동감이 넘쳤죠. 하나 같이 주인공 같았어요.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윤대협, 정대만. 모든 에피소드가 지루할 수가 없어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어떤 활약을 펼칠지 궁금하니까요. 'H2'는 야구를 빙자한 연애 만화죠. 약간은 시 같기도 해요. 대사를 생략하고, 장면으로 처리하는 정적인 방식으로, 독자의 감정을 흔들어 놓죠. 찡하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나고, 그렇다고 야구 이야기가 긴장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H2는 언제 봐도 재밌나 봐요. 장면, 장면이 그냥 좋아요. 나른하고, 깨끗한 토요일 오후 두 시 감성이라고나 할까요?


지금은 가끔 웹툰 정도 봐요. 얼마 전에 봤던 네이버 웹툰 '금붕어 '재밌더라고요. 영화 '아저씨' 류의 만화인데, 마지막엔 눈물도 찔끔 흘렸네요. 요즘엔 돈이 되는 게 웹툰이니까, 제가 모르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을 거예요. 이상하게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종이를 넘기던 낭만이 여전히 그립나 봐요. 내 손 안에서 한 장씩 넘어가던 그 감미로운 추억은, 웹툰으로 대체가 안 되니까요. 그래도 귀가 얇은 인간이니, 꼭 보라고 하는 웹툰은 또 봐야죠. 요즘 친구들은 보고 싶은 만화를 너무 쉽게 보잖아요. 지하철에서 웹툰 보는 학생을 보니까, 스크롤 내리는 속도가 빛의 속도더군요. 내용을 보기는 하니? 이왕 읽을 거, 조금은 천천히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림도 다들 정성껏 그리던데.


PS 매일 글을 씁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 하루가 비슷해져요. 이렇게 쓰면서, 조금이라도 하루하루를 쪼개 놓으려고요. 그래야, 미래에 오늘이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요. 기억에 남는 하루가, 결코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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