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만성 역류성 식도염 환자의 반성문

병도 엄청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by 박민우
mwangi-gatheca-xViKfocA-Uc-unsplash.jpg

오랫동안 저를 괴롭히는 병이에요. 목에 불쾌한 이물감, 소화불량, 가슴이 타들어가는 통증 등이 있어요. 최근엔 딸꾹질이 또 그렇게 나오더군요. 잠이 들면, 타들어가는 증상이 시작돼요. 온몸이 불덩이인 구렁이가, 명치부터 목으로 기어올라오는 것 같아요. 새벽에 통증에 눈이 번쩍 떠져요. 경험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염산이 식도까지 타고 올라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몰랐어요. 위산이 염산이라는 걸요. 몸뚱이가 그 무시무시한 걸 품고 산다는 걸 다들 아셨나요? 위에도 괄약근이 있는데, 그게 느슨해지면서 위산이 솟구쳐 올라오는 거래요. 항문이 느슨해져서 똥이 새는 것과 같은 거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어요. 과식, 폭식, 식후 눕기 같은 거요. 기름진 음식도 소화가 쉽지 않으니, 자제하면 좋고요. 삼가야 할 음식은 사람마다 달라요. 자신에게 특히 안 맞는 게 있어요. 저는 와인, 맥주, 커피가 직빵이에요. 최근엔 술자리가 없으니, 강제 금주가 됐어요. 커피는 디카페인을 마시면 또 괜찮더군요. 본의 아니게 비싼 스타벅스를 자주 가는 이유죠. 방콕에서 디카페인 커피는 스타벅스뿐이라서요. 최근에 그래도 큰 탈이 없이 지냈어요. 이틀 전에 또 타들어가는 증상에 깼어요. 식은땀까지 흘려가면서요.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신기한 게 역류성 식도염으로 죽은 사람은 없더군요. 제가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요. 굉장히 흔한 질환이래요. 성인 4명 중 한 명 꼴로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다니 위로도 돼요. 나만 그런 거면, 훨씬 더 무서웠을 테니까요.


음식 조절이라는 게 득도를 해야 가능하겠더군요. 몸이 조금만 괜찮으면, 신나서 먹게 돼요. 눈 앞의 맛난 음식을 왜 자제를 해야 하죠? 그러다 보면 가속도가 붙고, 감당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게 돼요. 늘 이런 식이었어요. 아플 때의 초심을 기억하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생활을 유지했다면 전 멀쩡했을 거예요. 그걸 못해서, 이렇게 큰 벌을 받고 있는 거죠. 오늘 아침밥을 먹고 나서, 잠이 쏟아져요. 짧은 여행을 다녀왔더니, 몸이 너무 무거운 거예요. 도저히 눈이 떠지지가 않아요. 그래도 누우면 안 돼요. 헐거운 위장 괄약근에서 위산이 질질질 샐 테니까요. 자고 싶으면 앉아서 엎드려 자야죠. 그런데 눕고 싶어요. 앉아서 자는 게 잠인가요? 제가 새인가요? 결국 유혹을 못 이기고, 누워서 잤어요.


예전에 임성한 드라마 '오로라 공주'에서 남자 주인공이 암 선고를 받아요. 치료를 거부해요.


-암세포도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 원인이 있겠죠. 이 세상 잘난 사람만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듯이, 같이 지내보려고요.


희대의 명대사를 남겨요. 역대급 개소리라며 조롱의 장면이 됐죠. 저도 어이없어했던 사람 중 하나였죠. 오늘 문득, 그 대사가 조금 와 닿아요. 병이란 놈이 그냥 병이 아니라,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저를 교란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를 어떻게든 눕히고 싶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싶은 병의 의지가 느껴져요. 모든 병도 스스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건 맞는 말 아닌가요? 병도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어요. 내 몸을 내가 어떻게 간수하는지 나름 파악하고, 가장 취약한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거죠. 식탐에 약하고, 잠의 유혹에 약한 저를 때로는 구슬리고, 때로는 물어뜯으면서 세력을 넓혀 나가요. 이놈들도 하나의 캐릭터고, 완전한 지성의 집합체예요. 요물이라는 거죠. 그래서 섬뜩하고, 그래서 어려워요. 인간은 게다가 늙어가기도 해서, 객관적 전투력은 날로 쇠락하고 있어요. 병과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어요. 무병장수의 비결은 두 가지인 것 같아요. 득도해서 그 어떤 스트레스에서도 자유롭거나, 철저한 절제로 자신의 면역성을 극대화하거나요. 그렇게 혼나고도, 뭐 맛있는 거 없나. 입맛을 다시는 저를, 역류성 식도염이 쉽게 놔줄 리가 없죠. 이놈에게 이름이라도 지어주고, 슬슬 구슬려라도 봐야겠어요. 분노의 역류라고 지을까 봐요. 제가 재미나게 봤던, 할리우드 영화거든요.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하는 이야기예요. 분노의 역류야. 지금은 네가 이긴 거 맞다. 마음껏 뛰어다니렴. 진검 승부를 위해 나는 도를 닦겠다. 너를 위한 놀이터라고 생각해. 좀 피곤하면 쉬기도 하렴. 내가 너를 발붙일 수 없는, 그런 금강불괴 몸뚱이가 될 때까지 우리 사이좋은 척 지내보자꾸나.


PS 매일 글을 씁니다. 죽으면 할 수 없는 것 중에 글 쓰기도 있으니까요. 살아 있는 김에 글이라도 쓰겠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모두가 몸부림치니까, 저도 글쓰기 하나 정도는 해야죠. 제 삶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코로나 시대, 자영업자의 고통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