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팬티스타킹이 없다면서 그냥 양말 신고 소풍 가라는 거예요. 80년대 국민학생이 팬티스타킹 없이 소풍을 어찌 가나요? 팬티스타킹은 여자만 입는 거 아니냐고요? 무슨 그런 시대에 뒤떨어지는 말씀을 하세요? 8살 각선미는 남자나 여자나 팬티스타킹으로 완성되는 거예요. 사립학교 다니는 애들은 매일 팬티스타킹에 예쁜 유니폼으로 꽃단장을 하는데, 소풍날이라도 제대로 착장하고 가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팬티스타킹 내놓으세요. 왜 형이랑 차별하냐고요? 내 팬티스타킹은 아예 없는 거죠? 그렇게 졸랐는데, 이러시긴가요? 울며불며 소풍 안 간다고 떼를 써서, 소풍날 퉁통 부은 사진만 있더군요.
2. 아디다스 비비화 없으면 등교 거부하겠습니다
비비화 아시나요? 농구화 말고, 비비화요. 그러고 보니까 비비화가 바스켓볼의 약자인가요? 그 말이 그 말인가요? 어쨌든 80년대 아디다스 비비화는 농구용 신발이 아니었어요. 어디까지나 외출용이었죠. 캔버스 천으로 만든 하얗고 하얀 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이었어요. 아디다스 비비화에 조다쉬 청바지 입고, 롤러 스케이트장에서 천천히 롤러스케이트 갈아 신을 때, 비로소 미아리 공식 멋쟁이로 등극할 수 있었죠. 중학교 때, 친구들이 돈 모아서 생일 선물로 비비화를 사줬어요. 그걸 개시도 안 했는데, 저의 아름다운 형님께서 먼저 신겠다며 박스를 열지 뭡니까? 나를 죽여라. 절대로 못 신고 간다. 네, 죽도록 맞았어요. 때도 잘 타는 비비화를, 주인보다 먼저 개시를 하다뇨? 형이 진짜 벼슬이라니까요.
3. 너는 아식스 목폴라도 안 하고 미팅 나가니?
이게 어떻게 보면 실용적이고, 어떻게 보면 좀 엽기 아이템이었죠. 목만 가리는 아이템이었으니까요. 아기 턱받이처럼 생겼어요. 목폴라를 해야 좀 사는 집 느낌이 났어요. 정장의 넥타이처럼, 교복 자율화 세대에겐 목폴라가 교복이었죠. 이게 있어야, 갖춰 입은 느낌이 났어요. 꼭 아식스 목폴라일 필요는 없는데, 저는 아식스 걸 샀어요. 가격도 몇 천 원 안 했을 텐데, 큰 마음먹고 샀던 기억이 나요. 목폴라나 양말 아니면, 그 비싼 아식스에서 살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죠. 저렴하게 '브랜드'를 입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어요. 겉만 번지르르했지, 안은 까맣게 땟물 범벅이었던 목폴라가 갑자기 그립네요.
4. 청바지 전쟁, 단 한 장이라도 브랜드는 있어야 대학생
그때 청바지 전쟁이었죠. 게스, 닉스, 겟유즈드,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96뉴욕 등이 있었어요. 96뉴욕이 아주 비쌌던 걸로 기억해요. 이 중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어요. 저는 게스와 겟유즈드가 있었는데 둘 다 짝퉁이었죠. 겟유즈드는 지퍼 부분에 상표가 보이는 게 핵심이었어요. 지퍼가 안 열렸어도, 좀 봐주면 안 돼? 이게 겟유즈드를 입는 자들의 스왝이었죠. 이런 청파지에 이스트팩 배낭을 메어 주면, 압구정동 쏘다니는 교포 느낌 물씬 난다고 생각했죠. 저렴한 청바지 옹골진, 잠뱅이, TBJ 도 큰 사랑을 받았어요. 네, 저도 그런 건 짝퉁 안 입고 진짜 입었어요. 짝퉁 가격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니까요.
5. 자랑하기엔 부족하지만, 꿀리지도 않았던 이랜드 류
이랜드 류라고 하면 수십 가지 브랜드가 있었죠. 이랜드에서 나온 브랜드들만 해도 이랜드, 브렌따노, 언더우드, 쉐인, 헌트가 있었어요. 라이벌 논노에서는 아우토반, 제누디세, 니코보코가 있었고요. 삼성의 카운트다운, 대우의 하이파이브, LG 패션의 티피코시 등도 있었네요. 중소 브랜드로는 구김도 약간 제이빔, 그중에서도 더 저렴한 브이네스, 양말을 자주 사서 신었던 에드윈 등이 기억에 남아요. 외국 브랜드로는 베네통이 강세였어요. 이런 옷들은 으스대기엔 약하긴 한데, 폴로 랠프로렌이나 노티카 대용품으로 괜찮았어요. 어딜 가도 기죽을 필요까지는 없는, 대학생들의 유니폼이었죠. 빳빳하게 잘 다려서 입고 나가면, 그래도 갖춰 입는 성의는 있네. 목에 힘줘도 되는 브랜드들이었어요. 이 많은 브랜드들 중에 몇 개나 살아남았나요? 새삼 세월이 무상하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는 매일 하루씩 수명이 단축됩니다. 대신 돌아보면, 이만큼의 글을 썼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두려움을 글을 쓰면서 잊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