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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Feb 22. 2021

한 없이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해석력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다. 이 말처럼 주관적인 것도 없어요 

제가 안경을 썼을 때, 코미디언 이윤석 닮았다는 얘기를 그렇게 많이 들었어요. 기분 나쁘죠. 제가 훨씬 더 잘 생겼으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아마 상당히 많은 사람은 이윤석이 더 잘 생겼다고 생각할 걸요? 그런데도 저는 억울하고, 분해요. 어딜 봐서 제가 이윤석이냐고요? 제가 생각하는 저의 외모는, 거울에서 가장 이상적인 조명을 받았을 때의 늠름한 모습이에요. 반면 이윤석은 비실비실, 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로 개그하겠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죠. 나는 24시간 중에 최상의 모습을, 이윤석은 이윤석 하면 떠 오르는 개그 이미지를 비교하게 돼요.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 누구 닮았다는 말 자제하시는 게 좋아요. 심지어 대단히 예쁘고, 잘 생긴 사람 닮았다고 해도 화내는 사람 있어요. 본전도 못 찾는 말을 칭찬이랍시고 했다가, 봉변당하실 수 있다니까요. 


연예인 실물 이야기할 때, 키 이야기 많이 나오죠? 저랑 비슷하던데요. 이럴 경우엔 연예인이 더 클 확률이 높아요. 비슷한 사람은 왠지 자신보다 작아 보이거든요. 자기보다 조금 크면, 비슷해 보여요. 자기가 생각하는 키가 그 정도니까요. 눈대중으로 사람 키 맞추는 것처럼 부정확한 게 있을까 싶어요. 눈은 눈금자가 아닌데도,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고 확신하죠. 만약 사람 키를 정확하게 보는 시력을 갖고 싶다면, 수천 명의 키를 재보는 직업을 가져야 해요. 그런 사람은 정확하게 볼 수 있어요. 자신의 뇌에 남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입력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보통 사람에겐 그럴 능력이 없어요. 자신이 생각했을 때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슬프지만 그 사람이 본인보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나을 거예요. 우리의 시각은, 우리의 '바람'을 담고 있으니까요.  


그런 해석의 오류가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게, 세상의 부모들이죠.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얼핏 논리적이죠. 부모만큼 아이를 잘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신생아 때부터 24시간 끼고 살았는데요. 걸음마를 시작하고, 옹알이를 하고, 말을 트고, 글을 배우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는데요. 하지만 부모들이 잘 잊는 게 있어요. 자신들도 사춘기를 다 겪어 봤잖아요. 부모님이 자신들을 속속들이 다 이해하던가요? 꽝 막힌 부모님 때문에 답답한 적 없으셨나요? 자신들이 부모가 되면, 또 잊더라고요.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런 게 어딨어요? 그 아이들이 얼마나 영리한데요. 우린 본능적으로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요.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 위험해 보여도, 대부분은 빠져 죽을까 봐 근처에서만 놀아요. 동남아시아 시골에 가면, 아이들만 5남매, 6남매 그래요. 부모가 애들을 어떻게 살피겠어요? 그냥 아이들끼리 놀아요. 똥물에 어푸어푸 입 헹궈가면서요. 그렇게 살아도, 또 살아지더라고요. 사람 목숨 그렇게 쉽게 안 사라져요. 부모의 감시가 없는 세상에선, 그들만의 힘 논리가 작용하죠. 덩치가 크면, 집이 잘 살면, 인기가 많으면 그게 곧 권력이 돼요. 그리고 그 권력을 써요. 안 쓰면 낭비 같으니까요. 소박하게 자신의 인기를 누리는 데 그치는 친구들이 있고, 약한 애를 모욕하고, 짓밟는 쪽으로 쓰기도 하죠. 내 새끼는 그럴 애가 아니라는 말은 절대로 하시면 안 돼요. 그들만의 세상은 아무도 몰라요. 그들끼리만의 비밀이고, 그들만의 법칙이 있으니까요. 


요즘에 학교 폭력이 이슈가 되고 있잖아요. 친구를 변호한답시고, 그런 말을 또 하더군요. 내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저는 이 말도 신중하게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의 사랑스럽고, 의리 있는 친구가 어딘가에선 분명 악당이 될 수 있어요. 실수할 수 있어요. 내 눈에 비친, 바람직한 모습이 전부가 아니죠. 그래서 인간은 입체적이라고 하잖아요. 내 앞에선 잘 보이고 싶었나 보죠. 내가 무언가가 조금은 나아 보였나 보죠.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나 보죠. 함부로 할 수 있다. 그런 목표가 생겼을 때, 돌변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먹잇감을 찾은 거죠. 장난으로 괴롭히고 싶을 수도 있고, 자신의 억눌린 욕망을 삐뚤어지게 해소하고 싶을 수도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요? 우리는 적당히 몸을 사리거나, 강한 쪽에 붙거나, 당하거나 했을 뿐이에요. 저 역시 무서운 아이들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요. 그들을 응징할 능력이 안 되는 저는 그렇게 살아남았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가 많고, 모자라고, 비밀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약하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응원하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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